결국 <전우치>보다 <의형제>를 먼저 보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이 거의 백만년만인 것 같다.
강동원의 냉정한 눈빛. 기대대로 잘 어울렸다.
전체적인 느낌은, 추리소설에 비유하자면, 사립탐정 루 아처가 등장하는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을 연상시켰다고나 할까.
나는 루 아처와 루 아처가 등장하는 작품을 그런대로 좋아한다.
그러나 루 아처와 루 아처가 등장하는 작품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와 그가 등장하는 작품과 같은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깊이나 매혹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
흔히 하드보일드 계 추리소설 작가의 계보는
더 실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로 이어진다고들 하는데,
이들의 작품 중 하드보일드 계 추리소설의 극단을 보여주는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더 실 해미트의 <피의 수확>을 꼽겠다.
그러나 가장 매력있는 하드보일드 계 추리소설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빅 슬립>, <기나긴 이별>, <안녕 내 사랑> 등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을 줄줄이 열거하겠다.
반면,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은 보는 순간에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볼 수 있으나 딱 거기까지.의 느낌이다.
<의형제>라는 영화를 맥 빠지게 만드는 점 중 하나는
일단 엔딩이 유리상자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죠>라는 노래 제목을 연상시킬 정도로 너무 너~무 해피해피하고 그것도 대놓고 해피해피해주신다.
새드엔딩을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여운을 가지도록 처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민감한 소재들을 잔뜩 끌어들여놓고는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전혀 민감하지 않게 처리해버린다.
그래서 그 소재에 천착해서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자면 뭔가 영화를 채울 거리가 있기는 해야하니까 이거저거 주워담은듯한 느낌이 되어버렸다.
대표적인 예로, 영화 막판에 재등장한 암살자 '그림자'의 행동이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림자 개인의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인 것으로 처리한 것을 들 수 있겠다.
얼마나 지원의 입장을 편하게 해주는 설정인가.
지원은 누구도, 무엇도 배신하지 않아도 된다. 선택을 놓고 가치 면에서나 심리적인 면에서 갈등할 필요를 아예 제거해주신다.
살인기계와 같은 그림자 개인에게 지켜야할 의리나 의무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백만년만에 영화관에서 관람한 영화에 대한 감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겨워하지 않고 보기는 했으나 으음, 아쉬웠다.
일본의 경우 번외편이나 외전 문화가 상당히 발달해있다. 이런 번외편이나 외전에서는 본편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나 생략된 이야기, 후일담, 소소한 에피소드 등을 다루기도 하지만, 본편에서 주인공이 아닌 등장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추젠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등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에노키즈를 주인공으로 한 <백기도연대>라든가,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아케치 경감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행본들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런 경향은 만화나 소설에서만이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춤추는 대수사선>의 경우는 <심야에도 춤추는 대수사선-완간서 사상 최악의 3인>이라는 제목으로 본편에서 감초 역할을 하는 완간서 간부 중년 3인방을 중심으로 한 5편의 짧은 에피소드를 제작하여 방송한 바 있고, <파트너(相棒)>의 경우는 <우라아이보우(裏相棒)>라는 제목으로 본편의 주인공인 특명계 파트너들을 끊임없이 갈구며 깐죽거리는 수사1과 3인방과 감식 업무를 담당하는 요네자와 네 사람만을 등장시킨 8편의 짧은 에피소드를 극장판 개봉에 맞춰 제공하여 내가 정말 당신들 때매 못살아.라며 웃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드라마 중 <파트너(相棒)>, <후루하타 닌자부로>와 더불어, 사건 풀이 중심의 대표적인 정통 형사물이라고 꼽는 <경시청 수사1과 9계>의 경우는, 9계의 유일한 여성인 코미야마 형사의 실연의 역사를 다룬 소설을 드라마 막판에 홍보하는 것을 보고 정말 헉!한 바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도 외전 문화의 발달을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본편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극장판 영화의 제작이 아닌가 싶다.
와~ 극장판을 만들 정도로 티켓팅이 되나봐. 뭐 이런 느낌.
<춤추는 대수사선>의 세번째 극장판 <교섭인 마시타 마사요시>와 네번째 극장판 <용의자 무로이 신지>, 그리고 <파트너(相棒)>의 두번째 극장판 <감식 요네자와 마모루의 사건부>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
<교섭인 마시타 마사요시>는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본편에서는 그다지 든든해보이지 않는 마시타의 존재감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었고 마시타를 연기한 유스케 산타마리아라는 연기자도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어쨌든. 일본의 이런 외전 문화를 보면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공은 자기자신.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곤 한다.
<춤추는 대수사선> 본편의 이야기는 아오시마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그건 아오시마는 주인공의 인생을 살고 있고 마시타는 조연의 인생을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오시마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시타를 중심으로 한 <교섭인 마시타 마사요시>를 들여다 보면 마시타가 주인공이고 중심이다.
아오시마는 그야말로 그저 딱 한 컷 등장하는 스쳐가는 역할일 뿐.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재미있는 이야기인가?
2010년, 올해, <춤추는 대수사선>의 새로운 극장판이 개봉한다고 한다. 오구리 슌이 오다 유지가 연기하는 아오시마 형사의 부하로 나온다나.
정말 일본의 끝없이 우리고 리메이크하는 문화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
67%라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산출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정말이지 김전일이 가는 곳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시체가 쌓이곤 한다. 코난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들을 무색케 하는 인물이 일본의 대표적인 형사 드라마 <파트너>의 스기시타 우쿄 경부가 아닌가 싶다.
현재 시즌 8이 방영되고 있는데, 시즌 7의 8회에서 7년간 스기시타 우쿄의 파트너로 함께 해온 카메야마 순사부장이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사표를 내고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으로 극 중에서 처리되며 하차한 뒤, 시즌 7의 마지막 회인 19회에서 새로운 파트너로 칸베 타케루 경부보가 부임해온다.
칸베 경부보는 이틀째 결근 중이면서 자신의 부임 첫날부터 행방을 알 수 없는 스기시타 경부를 여기저기 찾아헤매는데, 감식을 담당하고 있는 요네자와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요네자와: 스기시타 경부를 찾으시나요?
칸베: 네.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요네자와: 확신은 없지만 마즈카리 마을에 계실지도...
칸베: 마즈카리 마을?
요네자와: 실은 어제 스기시타 경부가 부르셔서 마즈카리 마을에 가서 혈흔반응검사를 했습니다.
칸베: 뭔가 사건이라도?
요네자와: 아직 사건이 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스기시타 경부가 이제부터 사건으로 만들려는 것 같습니다.
칸베: 네? (독백) 자신이 사건을 만들거나 한단 말인가?
이런 내용의 대화를 나눌 때의 요네자와로 등장하는 롯카쿠 세이지.와 칸베로 등장하는 오이카와 미츠히로,의 표정과 억양!
예술이다.
어쨌거나 스기시타 경부가 사건, 추리물계의 최강 캐릭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사건을 만들기도 하는 캐릭을 누가 넘어선단 말인가!
물론 실제로는 스기시타 경부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일어나게 하거나 해서 말그대로 사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밝혀지지 않아서 사건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는 건을 파헤쳐 사건화되도록 하는 것일 뿐.
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킨다이치 코스케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탐정으로, 에도가와 란포의 아케치 코고로와 더불어 일본인들에게 대단히 사랑받는 소설 속 탐정이라고 한다. <아케치 코고로 대 킨다이치 코스케>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질 정도로.
<아케치 코고로 대 킨다이치 코스케>에서 킨다이치 코스케로는 나가세 토모야.가 등장한다.
김전일 할아버지는 대체 어떤 사건들을 해결하고 다녔는지 궁금해져서 언젠가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을 찾아 읽어보리라 하던 중에 킨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길래 봐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없이 리메이크 되었으므로, 만들어졌다길래 봐준 것이 아니라, SMAP의 이나가키 고로가 킨다이치 코스케 역을 맡아 5개의 에피소드를 드라마로 만든 시리즈를 비교적 쉽사리 구해볼 수 있어서 봐주었다.
어쨌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보면 재미있다.
1화 이누가미 일족에서는 카토 아이.가,
2화 팔묘촌에서는 후지와라 타츠야.가 메인 게스트로 등장하고,
3화 여왕벌에서는 밋치 왕자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오이카와 미츠히로.가 황족(?)으로 등장해서 한참 웃었다.
4화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에서는 나리야마 히로키가 악역으로 등장한다. 나리야마 히로키는 트릭, 블러디 먼데이 등에서도 악역으로 등장한 바 있는데 은근히 악역이 잘 어울린다.
5화에서는 그다지 비중있는 역할은 아니지만, 야마다 유가 등장해주신다.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처럼 살해 방법 자체가 엽기적이고 끔찍한 내용들은 아니라서 그다지 찝찝하지 않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데,
한 가지 경악스러운 점은 팔묘촌의 경우 막판에 88명이 몰살 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때 김전일과 관련된 우스개 소리 중 김전일은 사건은 해결하지만, 살인을 막지는 않는다? 못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정말로 김전일을 보다 보면 죽을만큼 죽은 뒤에야 사건을 해결하곤 하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또한 조부 때부터 이어진 가문의 내력인가보다. 88명의 몰살은 막을 줄 알았는데.
으음~ 심하시다.
주인공은 칸자키 나오.와 아키야마.
애초에 라이어게임에 참가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칸자키 나오는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소지금을 빼앗기면서 천재 사기꾼인 아키야마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자의반타의반 두 사람은 라이어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실사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현재 시즌2까지 방영되었는데 내용상 파이널 스테이지가 펼쳐질 시즌3 또한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꽃보다 남자>에서 다도하는 남자, 소지로.로 등장했던 마츠다 쇼타.가 아키야마로, 역시 <꽃보다 남자 리턴즈>에서 꽤나 짜증나게 하는 인물인 우미.로 등장했던 토다 에리카가 칸자키 나오.로 등장한다.
마츠다 쇼타의 아키야마는 한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인상적이다.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마츠다 쇼타의 연기가 인상에 남았던 작품으로는 개인적으로 <명탐정의 규칙>을 꼽고 싶다,
아키야마를 상당히 독특하게 해석했다.
마츠다 쇼타의 아키야마는 만화를 보며 아키야마가 L에 비해 조금 더 냉소적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아키야마에게서 <데스노트>의 L을 떠올렸던 나로서는 대단히 어색함이 느껴지는 아키야마다. 지나치게 심각하고 엄청 폼 잡고 상당히 음침, 음험하다는 느낌이랄까.
만화 원작에서의 아키야마는 사기죄로 복역까지 했지만 기본적으로 상당히 반듯하다고 해야할까, 정의롭다고 해야할까, 사기의 달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근본을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 마츠다 쇼타의 아키야마는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내뿜으며 정말 이 인물을 끝까지 믿을 수 있을 것인지가 살짝 불안해지는 마음이 들게 하는 분위기를 풍긴다. 돈 때문에 배신할 것 같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만화 원작에서의 인물과 다르게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저 정도로 무게 잡을 필요가 있나 싶은데, 덕분에? 한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스테이지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라이어게임에서의 두뇌싸움이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확률 등 수학적 감각이 있으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일듯 싶다.
또한, 주제의식도 꽤나 참신하다. 거짓말게임에서 승자가 되면 큰 이익을 누릴 수 있지만, 큰 이익을 취하는 승자가 생긴다는 것은 거액의 부채를 짊어지게 되어 곤경에 처하는 패자가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라이어게임의 참가자들은 혼신을 다해 승자가 되기 위해, 최소한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누구도 믿지 않고 정직을 우습게 여기는 살벌하고 냉혹한 적자생존의 두뇌싸움을 계속해 벌인다.
여기서 라이어게임 참가자 중 매우 이질적인 존재인 칸자키 나오는 승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아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모든 사람들이 버린다면, 즉 승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패자가 되지 않는 것이 라이어게임의 본질이라고 매우 색다른 해석을 내린다.
게임참가자 중 많은 사람들이 패자가 되지 않고 라이어게임에서 풀려나기를 원하지만, 패자가 없는 결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게임 참가자들이 서로 믿고 도와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을 믿어도 될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정직해도 될 것인가? 다른 사람이 어떤 심각한 곤경에 처하든말든 누군가는 자신만은 승자가 되어 거액을 챙기고 싶어하지 않을까? 과연 모든 사람이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결과를 위해 노력하려할까?
작품 분위기상, 작품의 결말은 칸자키 나오.의 이상론의 승리 내지는 최소한 패배하지 않는 상황으로 매듭지어질 것 같지만, 현실이라면 어떨까?
물론 현실에서는 <라이어게임>에서와 같은 게임이 벌어지지는 않지만,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라이어게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문하게 되는 문제는 세 가지.
현실에서의 나는 칸자키 나오.의 이상론에 동의하는가?
만약 그러한 이상론에 동의한다고 했을 때, 그러한 이상론에 입각해 행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나는 과연 어떤 입장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
쉽게 답하지 못하고 고민한다는 것은 일단 칸자키 나오.와 같은 굳은 신념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소한 패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아키야마와 같은 지략을 갖고 있지 않은. 그래서 이상론을 펼치다가 자칫 패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는 나인가?
아니면, 원한다면 충분히 승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자신하는 나인가?
나는 어떤 입장에 서서 어떤 점 때문에 답을 망설이는가?
시즌3이 아니라 2010년 3월 개봉되는 영화로 결말을 낸다고 한다. 드라마 시리즈가 영화로 결말을 낼 때 그다지 재미있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거 같아 살짝 불안. 일본 영화의 국내 상영 비율이 높지 않아서 구해서 보려면 상당히 시일이 걸릴 것 같은 것도 그닥 반갑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꽃보다 남자>의 경우 정말 초호화 출연진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들이 왕창 출연함에도 캐릭이나 줄거리 자체가 마음에 안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마츠 준은 <고쿠센>, 오구리 슌은 <고쿠센>과 <도쿄 DOGS>, 마츠다 쇼타는 <명탐정의 규칙>, 토다 에리카는 <보스>에서가 훨 마음에 든다.
한동안 잠수하는 사이에 2010년이 되어버렸는데, 유난히 의욕이 안생기는 연말연시다. 이유는 불명.
이 상태가 한동안 지속될 분위기.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이 조금 업될 것 같기도 한데, 맛있는 게 대체 뭘까?
들깨와 찹쌀을 갈아 토란을 넣고 만든 토란들깨탕과 <자하 손만두>의 버섯 잔뜩 들어간 편수,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의 단팥죽, 두툼한 오코노미야끼에 사색교를 포함한 각종 딤섬을 연타로 먹어주면 될까?
이 작품은 인간을 펫으로 기른다는 기본 설정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오랫동안 지나치며 보지 않았던 작품인데, 실사 드라마를 먼저 본 다음, 만화 또한 챙겨보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펫이 가지는 의미는 자신의 약점이나 약한 모습을 포함하여 진솔한 모습을 모두 드러내보일 수 있고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신을 경멸하거나 추하게 여기지 않고 배신하지 않을 존재, 그것을 약점 삼아 자신을 곤경에 처하도록 만들지 않을 존재, 그리고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신뢰하며 힘들 때 위안이 되어주면서 볼썽사나운 모습까지 포함하여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적자생존의 경쟁체제 속에서는 자신의 약점이나 약한 모습을 쉽게 드러내기 어렵다. 약점이나 약한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그것이 곧바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공격 포인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체제 속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남녀에게 공히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여성에게는 이 점이 양면적인 딜레마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남성과 상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남성보다 여성이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경우는 이것이 딜레마적인 상황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경쟁 속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은 남성 또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만, 남성에게는 전통적으로 강인함이나 냉철함이 남성다운 것으로 여겨져 공적 영역에서 요구되는 특성과 남성이라는 성에 요구되는 특성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이라는 성에 요구되어온 여성다움은 강인함, 냉철함과는 거리가 있다. 남성이 연애상대나 결혼상대로서 원하는 여성의 모습은 강인함이나 냉철함이 아니라 자신보다는 연약하고 그래서 남성이 지켜주어야만 하고 지나치면 곤란하겠지만 적당히 남성에게 의존적인, 즉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청순가련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여성의 경우 공적영역에서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성공을 위해 요구되는 특성과 여성으로서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요구되는 특성에 괴리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여성은 공적인 측면과 사적인 측면에서 딜레마를 안게 된다. 강하고 빈틈없고 냉철한 엘리트로서의 여성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할지라도 동료들에게 밥맛 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영역에서 인정받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을 능가하는 업무 능력을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빈틈없는 일처리와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게 되었을 경우 동료 남성들에게는 재미없는, 좀 더 적나라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재수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동료 여성들에게도 질시의 대상이 된다. 또한 업무 능력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강인하다거나 업무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는 치밀함이라든가 냉철함들이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어온 여성다움과는 거리가 있기에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커리어우먼들은 여성으로서 매력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이로 인해 동료 남성과 여성들에게 비아냥의 소재가 되곤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커리어우먼은 더더욱 빈틈을 보이면 안되고 자신의 약한 면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연애라는 사적인 측면에서 성공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어진다
즉 공적영역에서 경쟁하는 여성은 강인하고 빈틈이 없으면서 완벽한 일처리를 할 수 있을 것이 요구되면서 한편으로는 약하고 의존적이고 보호대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중적이고 상충적인 과제를 안게 되는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물론 이 균형을 감탄할 정도로 잘 유지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꽤나 예외적이고 특수한 사례일 것이다.
여기서 일단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이러한 균형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추구할 가치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난 예스.라고 생각한다. 가식적으로 약한 척 해보임으로써 연애 상대나 배우자의 보호본능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약한 부분, 약해지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어려운 순간을 이겨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안으로 삭이고 쌓아두기만 한다면 점차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강해야 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식의 사고는 그간 남성에게 과도한 억압의 굴레로 작용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너는 펫>에서 제기하는 펫을 필요로 하는 현대인의 상황은 여성에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단지 일단 현재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양가적인 속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여성에게 더 큰 압력과 딜레마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너는 펫>은 현대 여성의 이런 딜레마에 주목하여, 일에 있어서는 유능하다고 평가받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그리고 바로 그런 점으로 말미암아 직장이나 이성에게 경원시되는 여성이 자신의 속내와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일 수 있는 상대가 펫밖에 없다는 점에 대한 착상을 기반으로 구상된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의 구상 의도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인데 <너는 펫>이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펫은 인간 펫으로, 펫과 같은 상태의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 공감하더라도 실제로 인간을 펫으로 간주하여 기르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약한 모습을 스스럼없이 보일 수 있는 펫과 같은 존재를 사실상 필요로 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인간을 펫으로서 곁에 두는 것은 아주 특이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거나 피치 못할 상황인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주 특이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설정하면 간단하기는 하지만, 펫을 필요로 하는 현대인의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대표성이 상당히 떨어져 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피치 못할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너는 펫>이라는 만화나 드라마 모두 이와 같은 피치 못할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만화에서는 여주인공 스미레가 계속 스미레의 집에 머물게 해달라는 남자아이에게 설마 이렇게 말하면 나가겠지.라는 생각으로 펫으로서라면 머물러도 좋다고 하자 남자아이는 의외로 기뻐하며 그러겠다고 하고 이에 스미레 또한 흐음, 그래?라는 정도의 느낌으로 모모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남자아이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다. 그런데 이처럼 알지 못하는 타인을, 그것도 펫을 하겠다는 특이한 인간을 흐음, 그래? 정도의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는 것을 결코 일반적인 경우라고 볼 수도 없고 피치 못할 상황이라고 볼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만화의 주인공 스미레는 상당히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버리고 일반적인 커리어우먼의 대표성을 가진 존재로 보기 어려워진다.
드라마에서의 상황은 더 납득이 안가는데, 드라마에서의 스미레는 흐음, 그래? 정도의 반응을 보이며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쫒아내려고 했으나 사정하며 달라붙는 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마지 못해 머물게 하는 느낌인데, 그래서 만화에서의 스미레와는 달리 펫이니 인권도 없고 자신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못박으며 꽤나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며 상처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고 모모를 배려해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마지 못해 머물게 하는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드라마에서의 스미레는 만화의 스미레와는 달리 꽤나 신경질적이면서 딱 부러지고 자신의 영역이 침범받는 것을 싫어하고 짜증이 많은 성격으로 보인다. 속내는 여리고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고 따뜻한 사람이긴 하지만.
내 지인 중에 딱 이런 성격인 사람이 있는데, 이 친구 성격을 생각해보면 죽었다 께어나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남녀를 불문하고 집에 머물게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하늘이 두 쪽 나는 일이 생겨도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친구와 똑 같은 성격을 가진 드라마 속의 스미레가 달라붙어 사정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모모를 집에 두고 펫으로 기른다는 것은 굉장히 위화감이 든다고나 할까. 참으로 납득이 안되는 대목이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이것을 문제로 삼으면 작품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니까.
모모를 펫으로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는 대목을 접어두고, 만화와 드라마에서 그리고 있는 스미레가 현대 커리어우먼으로서 대표성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 존재인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만화에서는 스미레에 대한 주변의 경계와 비아냥이 스미레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난 여자에 대한 주변의 질시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느낌이기에 그래도 대략 스미레가 주제의식을 대변하는 현대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대표성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드라마의 경우 스미레는 꽤나 신경질적인 여성이고 사회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느낌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주변사람들과 원만하지 못한 주된 원인을 주변사람들에게 돌리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스미레가 내 동료라면 나 또한 꽤나 짜증나게 느끼고 불편해할 것 같은 느낌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드라마에서의 스미레를 현대 커리어우먼의 일반적인 상황을 대변하는 대표성을 가진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의문이 생긴다.
구성과 전개에 있어서 또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스미레와 전업주부인 스미레의 친구와의 관계이다. 현대 커리어우먼이 펫을 필요로 하게 되는 심정이 되기까지는 사적 영역에서의 감정 교류에 있어서의 문제가 결정적이고, 여기에는 공적영역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동료 커리어우먼과의 견제만이 아니라 전업주부인 여성과의 갈등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미레의 경우 만화나 드라마에서 자신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보이고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존재한다.
<너는 펫>이라는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펫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현대인이라는 주제를 생각했을 때 자신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보이고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우정을 나누는 친구의 존재는 펫을 필요로 하는 상황의 절박성을 형성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친구인 전업주부의 입장에서 커리어우먼인 스미레에게 느끼는 질투?시기심?이 아주 슬쩍 지나쳐가는 정도로 건드려지기는 하지만, 친하지만 전업주부와 커리어우먼이 서로 벽을 느끼고 고독을 느끼며 펫을 필요로 하는 심정을 호소력있게 그려내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으로 <너는 펫>을 보며 고민하게 되는 문제는 이 작품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만화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펫으로서 관계맺음을 시작하지만 결국 그러한 관계를 통해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맺음을 하게 되면서 펫이 결국 애인이 되고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전개에 기반하여 이 작품의 메시지를 생각한다면, 현대인은 펫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있으며 펫과의 관계와 같은 진솔한 인간관계의 회복이 필요하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만화와는 다른 전개를 보인다. 스미레는 모모라는 인간 펫과의 관계를 좀 더 중시하는듯이 보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펫인 모모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좋아하긴 하지만 가식적인 모습으로 대해온 애인과의 관계에도 집착하며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미레 자신의 의사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애인인 상대가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애인과 인간 펫과의 관계가 양립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긴 하지만.
이러한 전개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펫은 어디까지나 펫이고 펫이 애인이나 결혼상대로 관계가 전환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펫은 펫으로서 필요할 뿐이라는 것일까? 다소 애매모호한 결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다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긴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전개는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인 전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애매모호해진다. 물론 메시지? 그런 것 꼭 있어야 해?라고 하면 할 말 없다.
이래저래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지만, 납득이 안가기에 더 많이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드라마의 경우는 귀여워.라며 아무 생각없이 마츠 준을 보면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고.
한 달도 더 전에 반쯤 쓰다가 중단하고 한동안 잠수를 한 끝에 이어 쓰다보니 꽤 아귀가 안맞는 부분이 많은 끄적거림이 되었다. 그래도 아예 다시 쓰기는 귀찮고. 귀차니스트의 면모를 한껏 드러내보인 포스팅이 되었다.
9화.
시로킨 고교 배구부가 전국 배구대회에 출전하는 쾌거를 이루자 양쿠미는 3학년 D반 악동들이 중심이 된 응원단을 결성하고 배구부를 응원하고자 한다. 그런데 작년 배구대회 직전에 폭행사건을 일으켜 배구부의 출전에 지장이 있을 것을 우려해 과도한 처벌을 받고 퇴학된 쿠로사키가 원한을 품고 배구대회 출전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양쿠미는 쿠로사키의 퇴학을 방치했던 체육교사 이와모토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쿠로사키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하는 한편, 쿠로사키와 단짝이었던 사와다, 우치와 더불어 쿠로사키를 설득하려고 한다.
사와다와 우치가 너무 모범샘이 되어버려 살짝 재미없다는 느낌인 화이기도 했는데, 쿠로사키를 결과적으로 지켜줄 수 있었을지의 여부를 차치하고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었다면 쿠로사키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쿠로사키가 뒤늦은 사과를 받아들이든 않든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교사의 임무가 아니겠냐고 이와모토 선생을 설득하는 양쿠미의 이야기에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언제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은 <고쿠센> 전체를 통해 반복되고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아닌가 싶다.
또한 양쿠미는 쿠로사키에게도 학교의 처사가 심하긴 했지만 애초 원인 제공은 쿠로사키 자신이 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라며, 지나간 일에 연연해하며 언제까지나 남탓만 하며 계속 과거를 돌아보고 넘어진 채로 있지 말고 앞을 보고 자신의 미래를 이제부터 어떻게 열어갈 것인지를 생각하라고 한다.
과거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살아가는 것은 현재이고 현재는 다음 순간 과거가 된다. 과거를 잘라내 버린다면 과거보다 좀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꿈꿀 수 있을까. 그러나 과거를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과거에 붙들려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딛고 현재를 살아가고 앞을 보고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하여, 쿠로사키들아, 힘내라.
10화.
양쿠미는 명문 에쇼 고교의 교사와 맞선을 보게 되는데, 사귀고 싶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시로킨 고교 학생들을 폄하하며 에쇼 고교로 옮길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한편 절도를 의심받는 상황에 처한 3학년 D반의 다섯 악동들은 쿠마와 부딪힌 에쇼 고교 학생이 떨어뜨리고 간 물건을 우치가 주웠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누명을 벗기 위해 다섯 악동들은 진범을 찾으러 에쇼 고교를 찾아가고 양쿠미 또한 달려와 에쇼 고교의 교사인 맞선 상대와 언쟁을 하게 된다.
양쿠미는 다섯 악동들의 말을 믿는다며 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근거는 이들과 함께 지내온 3개월이라는 시간 속에 있다고 말한다. 1화에서 학생을 믿는 것은 교사의 의무이기 때문이라고 하던 것과 대비되는 이야기다. 둘 다 좋은 이야기지만, 3개월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조금 더 현실적인 근거를 갖고 신뢰하고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함께 마음을 다해 부딪히고 깨지고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오고 진창을 뒹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는 확신일 테니까.
누명을 벗은 뒤 다섯 악동들은 양쿠미에게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예회복을 위해 에쇼 고교를 찾은 것이며, 자신들 때문에 양쿠미가 난처한 입장이 처하게 될 것을 우려해서 자신들의 일이니까 자신들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라고 말한다. 3개월 동안 참 많이 컸다 싶은 이야기다. 내가 담임이었더라도 참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을 듯 싶다. 그래서 에쇼 고교 교사에게 난 자랑스럽게 시로킨 고교의 이 아이들의 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는 양쿠미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양쿠미가 에쇼 고교 교사에게 시로킨 학생들의 말을 처음부터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거친 말투와 행동을 하고 학업성적이 떨어지는 시로킨 고교 학생이기 때문이고 에소 고교 학생이 절도를 할 리 없다는 것은 공부 잘하는 엘리트이기 때문이냐고 물으며,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학생들을 믿지 못하고 있으며 당신이 믿는 것은 학교의 이름과 자신의 프라이드라고 말하는 장면도 인상적인 장면에서 빼놓을 수 없겠다.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봐주는 것이 아니라 성적만으로 이러저러한 존재일 것이라고 간주되어버리는 에쇼 고교 학생들이 살짝 안스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11화.
3학년 D반의 다섯 악동들은 우연찮게 지명수배범을 잡아 경찰 표창을 받고, 양쿠미 또한 담임교사로서 밀착 취재의 대상이 된다. 라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쿠마의 아버지는 아들이 표창을 받은 것을 기뻐하며 사방에 자랑을 하고 이것이 민망한 쿠마는 아버지에게 모진 말을 하는데, 직후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뜨자 방황을 하던 중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어 심하게 맞고 있는 것을 양쿠미가 목격하고 불량배들을 제압하고 쿠마를 라면 가게로 데려가 나머지 악동들이 라면 가게를 돕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모가 평생 살아있는 것 아니다, 살아 계실 때 잘하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그런데 알면서도 마음 편하게 못해 드리고 서운해하실만한 이야기를 내뱉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일을 반복하게 되곤 한다. 그래서 우연찮게 표창 받은 것을 아버지가 사방에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 민망한 쿠마의 마음도 이해가 가는 한편, 아버지에게 모진 소리를 한 것이 마지막 대화가 된 것을 괴로와하는 쿠마의 마음 또한 이해가 되고, 남 일 같지 않다.
담임반 학생들이 표창을 받자 기자회견장에 동석해 방방 뜨는 양쿠미의 모습은 완전 코메디인데, 사실 불안했다. 집안 배경을 숨겨야 하는 사람이 저렇게 매스컴의 조명을 받게 되면 일 나지 싶고, 그래서 매스컴을 타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는 양쿠미의 태도가 실은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했다. 12화의 전개를 위해 약간은 억지스러운 전개다 싶었다고나 할까. 조금 더 자연스럽게 양쿠미가 사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뭐 코메디적 요소가 강한 드라마에서 현실성을 따진다는 것이 좀 우스운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 더 그럴듯한, 납득할 수 있는 전개인 것이 낫지 않았을까나.
12화.
쇼킹한 기사거리를 위해 양쿠미를 밀착취재하던 기자들이 양쿠미네 집안이 야쿠자이며 전후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쿠마를 구하게 위해 불량배들을 제압하는 양쿠미의 사진을 찍어 폭력교사라고 악의적인 보도를 한다. 몰려든 기자들과 3학년 D반 학생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이지고 이를 빌미로 시로킨 고교의 이사장은 양쿠미에게 3학년 D반 학생들의 전원퇴학과 양쿠미의 사직 중 택일을 하라고 한다. 양쿠미의 사직을 알게 된 3학년 D반 학생들은 시로킨 고교에서 개최된 교육심포지움 행사장에 뛰어들어 양쿠미의 사직 철회를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3학년 D반 전원이 자퇴하겠다고 선언한다.
쇼킹한 기사거리는 아니겠지만 부친상을 당한 친구를 돕고 있는 학생들의 미담 기사를 쓸 수도 있었던 거리를 야쿠자 집안의 폭력교사에 대한 기사로 악의적인 보도를 하는 참 나쁜 기자들이 등장한다. 씁쓸한 이야기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교문을 나서는 양쿠미를 막아서는 3학년 D반 학생들에게 양쿠미는 이제 너희들에게 질려서 사직하는 거라고 씨도 안먹힐 거짓말을 한다. 실은 이 장면은 상당히 작위적이라고 생각하고 이제까지 양쿠미가 주장해온 정정당당 기조에도 어긋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심포지움 행사장에 난입한 학생들이 양쿠미의 사직 철회를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전원 자퇴하겠다는 선언을 하는 순간 달려온 양쿠미에게 사와타리 교감은 연단에서의 발언 기회를 주는데 이때 하는 이야기를 실은 사직서를 내고 학교를 떠날 때 학생들에게 했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랬다면 양쿠미의 사직 철회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드라마를 통해 연출될 수 없었겠지만, 현실적으로 본다면 그쪽이 자연스럽고 전체적인 흐름에도 실은 어울리는 전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마지막 연설(?)을 끝낸 뒤 양쿠미는 연단을 내려와 사와다를 비롯한 3학년 D반 학생들을 스쳐 행사장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양쿠미가 스쳐지나가는 순간 스르르 눈을 감는 사와다의 속눈썹 끝에 눈물이 한 방울 매달리는 장면이 무진장 인상적이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고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속눈썹 끝에 딱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건 아무리 훌륭한 연기자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또 그렇게 하라고 요구를 한다고 해서 쉽게 연출될 수 있는 장면이 아닐텐데, 딱 어울리는 장면이면서 잊지 못할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양쿠미의 사직이 철회되자 환호하며 양쿠미를 무등을 태워 행사장을 돌고, 이어 양쿠미 복귀 기념 야외수업으로 깡통차기를 하는 3학년 D반 악동들의 마지막 모숩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양쿠미 특유의 "오!"를 외치며 불끈 쥔 주먹을 높이 치켜드는 화이팅 포즈를 전원이 함께 하는 것이 엔딩 씬인데, 1기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와다가 이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순간이기도 하다.
V6가 부른 <고쿠센> 1기의 주제가 <Feel your breeze>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 분위기와도 상당히 잘 어울렸고, 특히 노랫말 중 "언젠가 상상했던 미래와 지금이 조금 다를지라도"라는 부분은 심하게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상상했던 미래와 지금이 조금 다를지라도 미래를 꿈꾸며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상상했던 미래에 조금은 더 근접해 있지 않을까.
또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현재가 미래를 꿈꾸며 노력해온 결과라면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를지라도 당당할 수 있고 뿌듯하게 여길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전체적으로 참 괜찮은 드라마였지만, <고쿠센> 전반에 걸쳐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랄까 살짝 불편한 부분이랄까 하는 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아주 특별한 한 사람의 교사 양쿠미를 중심으로 학생들과 학교가 변화되어가는 것도 그렇지만, 이지메를 극복하는 것도, 무리하게 당한 퇴학에 연연해 하지 않고 앞을 보고 자신의 미래를 열어가는 것도, 개인의 자세와 의지의 중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것이 아닌가 라는 느낌이었다.
물론 개인의 자세와 의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자세와 의지만으로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불편부당함을 극복하고 해결할 수는 없다.
양쿠미는 교육심포지움 행사장에서의 마지막 연설에서 3학년 D반 학생들에게 공부는 엉망일지 모르지만, 우등생은 아닐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마음 속에 갖고 있다며 자신을 갖고 살아가라고 한다. 감동적이라면 감동적인 말이지만 난 왜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아이들이 공부 못하는 학생, 우등생이 아닌 학생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의 학교는 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3학년 D반 악동들 또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꿈이 있고 그것을 잘 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흥미 있는 부분이라면 악착같이 끝까지 달려들 꽤나 끈질긴 근성을 갖고 있는 녀석들이다. 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근성을 보이며 달려들어 잘 할 수 있고 미래를 열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반을 학교에서 제공해주지 않고 학교 성적은 엉망이지만 자신을 갖고 살아라.라고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우등생은 아니지만 자신을 갖고 살라고 개인의 자세와 의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 괜찮은 녀석들이 우등생일 수 있도록 학교가 바뀌면 안되는 것일까?
5화.
거리에서 각목 등을 동원한 심각한 집단폭행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3학년 D반 악동들 또한 눈에 거슬리는 다른 반 아이를 교실에서 집단폭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양쿠미가 이건 싸움이 아니라 폭력이라며 이를 꾸짖자 싸움과 폭력이 뭐가 다르냐며 3학년 D반 악동들은 반발한다.
한편, 좋아하는 여학생이 집단폭행을 당할 위험에 처한 것을 알게 된 쿠마는 여학생을 지키기 위해 혼자 달려가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사와다와 양쿠미 또한 쿠마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들과는 별개로 전날 밤 집단폭행을 당한 급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3학년 D반의 다른 악동들 또한 같은 장소로 몰려든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도착한 양쿠미는 집단패싸움을 저지하고, 3학년 D반 악동들은 싸움과 폭력의 차이를 깨닫게 된다.
(쿠마가 지키기 위해 애쓴 여학생은 나중에 쿠마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 모습을 3기에서 보여준다.)
이 에피 또한 상당히 인상적인 에피다. 양쿠미는 조부에게 예전에는 1대 10이라고 하면 한 명이 열 명을 대적했다는 의미였는데 요즘은 어떻게 된 것이 열 명이 한 명을 상대로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른다는 의미가 되고 있다며 그러고도 부끄럽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며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싸움과 폭력이 어떻게 다른지도 구별 못함을 개탄한다. 이 시점에서 나 또한 싸움과 폭력이 어떻게 다른지 고민했다. 다르다는 느낌은 있지만 과연 어떻게 다른지가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집단패싸움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양쿠미는 각목을 휘두르며 덤비는 상대들을 제압하는데, 짱인 녀석이 각목을 버리고 맨주먹으로 달려들자 양쿠미는 이를 순순히 맞아준다. 다음 순간 녀석은 주먹을 감싸쥐고 움칠하고.
양쿠미는 맨주먹으로 사람을 때리면 맞는 사람만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도 당연히 아프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무게가 확 와닿지 않냐며,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면서 변변찮은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며, 혼자서는 싸움할 배짱도 없으면서 거짓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이 즐겁냐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혼자 용감하게 맞선 쿠마를 칭찬하며 그게 바로 진짜 싸움이라고 말한다. 뭔가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 얼마나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싸움의 기본은 맨주먹으로 대면하는 것이며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뜨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아, 그렇구나.라는 느낌.
무조건 싸움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짜 싸움을 하라고 말하는 선생.
두들겨 패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맞아서 입술이 터지며 깨닫도록 하는 선생.
멋지지 않은가.
5화의 초반부에서는 드디어 사와다가 양쿠미가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아주는 과정에서 양쿠미네가 야쿠자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는데, 어줍잖은 말돌리기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조직원들을 제지하며 양쿠미의 조부는 사와다에게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야쿠자 집안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양쿠미가 학교에서 해직당하게 되는데 양쿠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양쿠미를 선생으로 인정할만하다고 생각하면 이 일을 가슴에 묻어주지 않겠냐고 청한다. 그리고 5화의 후반부에서는 사와다가 양쿠미에게 양쿠미 집안 일을 알고 있음을 밝히며 이로 인해 양쿠미가 해직되면 학교가 재미없어지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양쿠미 조부의 말대로 양쿠미를 선생으로서 인정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지만.
어린 학생에게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청하는 양쿠미 조부도 현명하고 거물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되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중심을 잡고 있는 사와다의 모습이 중간중간 드러나 꽤나 마음에 드는 화였다.
야쿠자 집에 들어서서 살짝 쫄았으면서도 쭈삣쭈삣 나름 할 말은 다하는 사와다의 모습을 마츠 준이 상당히 잘 표현한다고 느낀 화이기도 했다.
6화.
반대항 구기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전종목에 출전하려면 3학년 D반의 경우 한 명이 부족하다. 양쿠미는 그간 유키.라는 학생이 장기결석 중이었음을 뒤늦게 발견하고 2학년 말부터 계속된 장기결석, 등교거부의 원인이 쿠마와 미나미가 가담한 이지메에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양쿠미 또한 야쿠자 집안이라는 점으로 인하여 어렸을 때 심한 이지메를 당한 경험이 있고 조부의 조언으로 이를 이겨낸 경험이 있기에 구기대회도 구기대회지만 유키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학교에 등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등교거부 상태인 유키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양쿠미를 보며 쿠마와 미나미가 유키의 등교거부의 원인이 자신들이 가담한 이지메에 있음을 양쿠미에게 스스로 나서 말하는 장면이 기특했다. 사와다가 은근히 쿠마와 미나미에게 말할 것을 종용하긴 했지만.
풀이 죽어 눈을 질끈 감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양쿠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화 안내냐고 묻는 쿠마와 미나미에게 양쿠미는 이제 너희들 알았잖아.라며 웃고,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사와다도 미소를 띠며 자리를 떠난다.
멋진 녀석들에 멋진 선생이라는 느낌.
유키는 양쿠미에게 자신이 등교거부를 하는 이유가 쿠마와 미나미 등 이지메를 한 아이들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처럼 약한 사람은 누군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데 학교 교사들을 포함해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자, 양쿠미는 유키가 언제나 그렇게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도망쳐온 것을 질타하며 도망치기만 하는 녀석에게 손을 빌려줄 만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녀석은 언제까지나 만만한 법이라며 진정한 강함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이 동시에 강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지메를 하는 쪽과 이를 수수방관해온 방관자만이 아니라 이지메를 당하는 쪽의 변화와 대처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내용 전개였다. 한편으로는 이지메의 문제만이 아니라 강하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세상에 부딪혀 한두번쯤 만신창이가 되도록 깨져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은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지를 되새겨보게 하는 에피가 아니었나 싶다.
7화.
사와다는 부친과의 불화로 집을 나와 혼자 살고 있는데 부모의 기대를 혼자 다 짊어지게 된 여동생이 중압감과 부모와의 대화단절을 이기지 못해 가출하여 불법 도박 등이 행해지는 클럽에 간 것을 알고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클럽에 갔다가 여동생은 빼돌리지만 자신은 싸움에 휘말려 경찰에 연행된다.
여동생 때문에 클럽에 간 것이 밝혀지면 여동생이 퇴학 당하게 될 것을 우려해 사와다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사와다의 완고한 부친은 사정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사와다를 외면한다. 이에 양쿠미와 3학년 D반 악동들은 사와다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덕분에 경찰에서 풀려나고 퇴학이 취소된 사와다는 학교로 돌아오게 된다.
사와다의 동생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3학년 D반의 급우 전원이 비를 맞으며 사와다의 동생을 찾아 헤매는 장면이나, 보호자인 사와다의 부친이 경찰서로 사와다를 데리러 가는 것을 거부해 사와다가 경찰서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3학년 D반의 급우 전원이 사와다의 집으로 달려가 사와다의 부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와다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상당히 뭉클했던 화이다.
자신이 퇴학을 당하면서도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사와다가 양쿠미에게 사정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넋나간 표정으로 나 퇴학 당했겠네. (양쿠미의 목표인) 전원 졸업은 안되겠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심히 가슴 아팠다. 대체 저 이쁜 아이를 저 녀석 부모는 왜 못 알아보는 것인지.싶어서 답답하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퇴학이 철회된 사와다가 양쿠미와 함께 교실로 들어서는데 교실이 텅 비어 있어서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꽃가루가 터지며 숨어있던 친구들이 뛰어들어 사와다를 무등을 태워 교실을 도는 장면도 잊지 못할 장면이다. 친구들에 둘러쌓여 순간적으로 얼이 나간 표정이었다가, 늘 무표정에 가까운 사와다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오르고, 그런 사와다를 향해 마음껏 웃으라며 가끔은 그런 얼굴도 괜찮다는 양쿠미를 향해 사와다는 보기 드문 활짝 웃는 얼굴로 시끄럽다고 말한다.
시린 세상, 이 녀석들과 함께 라면 괜찮아.라는 느낌이랄까.
8화.
작년에 남편과 사별한 뒤 시부모가 키우고 있는 카와지마 선생의 초등학생 아들 유타가 카와지마 선생을 찾아오지만 유타가 조부모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무단으로 찾아왔음을 알고 카와지마 선생은 유타를 곧바로 냉정하게 돌려보내려고 한다. 실은 유타는 카와지마 선생의 남편과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며 나중에 유타가 자신이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상처받을 것을 염려해 카와지마 선생은 유타를 멀리 하려고 하는 것인데, 우여곡절 끝에 유타는 카와지마 선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이 에피에서부터 1기도 슬슬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구나.라는 느낌이었는데, 카와지마 선생이 연수를 간 동안 3학년 D반 악동들이 유타와 놀아주는 장면이 귀여웠고 사와타리 교감이 아닌 척 하면서 유타에게 마음을 쓰는 장면들로 인해 슬며시 웃음짓게 되기도 했다.
도입부에서 자습시간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켠 채 3학년 D반 악동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화자는 사와다 신, 내용은 시로킨 고교의 7가지 전설.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 만화의 첫번째 에피가 학교에 전해내려오는 7가지 불가사의인데, 2대 김전일 역을 맡아 연기했던 마츠 준이 시로킨 고교의 7가지 전설 이야기를 하도록 만든 제작진의 장난기가 느껴져서 쿡쿡 거릴 수 밖에 없었다.
<고쿠센> 1기를 보지 않은 경우 아래 내용은 심한 네타가 될 수 있으므로. 네타를 원치 않는 분은 피해가시기 바란다.
그리고 1기는 총 12화의 본편에 졸업식 편이 덧붙여져 있는데, 졸업식 편에 대한 감상은 생략한다. 무진장 늘어진다는 느낌인 데다가 꽤나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2기를 위해 1기를 마무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탓에 내게 있어서 <고쿠센>의 1기는 12화의 본편까지라는 느낌이기에.
1화.
양쿠미는 초임교사로 시로킨 고교에 부임하면서 문제아만을 모아놓았다는 3학년 D반의 담임을 맡게 된다. 얼마 뒤 사와타리 교감이 학생들의 보충수업비가 든 주머니를 분실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양쿠미 반의 쿠마가 보충수업비 주머니와 유사한 주머니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남에 따라 쿠마가 의심을 받는다. 쿠마는 가게에서 산 물건을 담은 봉투였으며 그 봉투는 하천에 버렸다고 하는데.
교사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 학생들과의 벽을 느끼며, 양쿠미는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의미라는 조부의 조언을 되새기며, 쿠마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워 쿠마가 하천에 버렸다는 봉투를 찾고.
그런 양쿠미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한 쿠마는 결국 자신들을 박대하는 교감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교감이 실수로 떨어뜨린 수금 주머니를 자신이 가져갔으며 곧이어 불량배들에게 주머니를 뺏겨 돈을 현재 갖고 있지 않다며 거짓말을 했음을 실토한다.
결국 양쿠미가 불량배들에게 돈을 되찾아와 교감에게 수금 주머니를 주웠다고 말하며 사건은 무사히 넘어가게 된다.
꽤나 인상적인 에피였는데,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한 쿠마의 말을 믿는다고 말하는 양쿠미에게 사와타리 교감이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양쿠미는 학생을 믿는 것이 교사의 의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학생을 믿는 것이 교사의 의무이긴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교사는 많지 않다. 그리고 때로는 위험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쿠마의 말을 믿고 하천을 밤새도록 뒤집는 양쿠미의 모습은 참으로 바보스러우면서 감동적이다. 밤을 새워 하천을 수색하고 있는 양쿠미를 발견하고 으아아아아아악.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쿠마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또한 쿠마가 돈을 가져갔음을 알려 퇴학되도록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위협하며 쿠마와의 대화에 끼어드는 사와다 신에게 양쿠미가 일절 대응하지 않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쿠마와 대화를 계속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문제의 핵심이 사와다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끼어드는 사와다를 상대하기 시작했다면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상당히 미숙한 대응이 되었을 것이다. 즉, 사와다를 상대하지 않음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흐뜨러뜨리지 않은 것은 상당히 현명한 대처였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런 상황에게 열받게 하는 사와다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수 있기에, 양쿠미의 대응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쿠마의 자백 후 양쿠미가 쿠마에게 선생을 바보로 만드는 것도 좋고, 싸움질 하는 것도 좋지만, 정정당당 가슴을 펴고 살 수 있도록 비겁한 짓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바람직한 일과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이 존재한다.
바람직하다, 않다는 것을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누군가에게는 바람직한 일이 누군가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다 좋은데 비겁한 짓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양쿠미의 말은 바람직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야기되는 일들이 다 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며 떳떳하게 사는 데 있어서 잊지 않아야할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한다.
2화.
미나미의 여자친구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음을 알게 된 사와다는 미나미에게 여자친구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고 이유를 모르는 미나미는 사와다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억울하게 오해를 받은 사와다는 반성문을 쓰지 않으면 퇴학을 당할 상황에 처하고.
미나미는 여자친구가 양다리를 걸쳤던 이웃학교 짱에게 불려가 집단폭행을 당하게 되는데,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양쿠미는 미나미를 혼자 보낸 단짝 쿠마, 우치, 노다를 질책하고 미나미를 찾아나서는데 근신 중이던 사와다가 미나미를 집단구타하고 있던 이웃 학교 학생들을 막아선 것을 목격하게 된다.
같이 가봤자 이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미나미를 혼자 보냈다고 하는 악동들의 변명을 듣고, 양쿠미는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뭉치는 것인데 그렇다면 좋을 때만이 아니라 끝까지 함께 뭉쳐야 하고 친구라면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너덜하게 되어도 좋은 거 아니냐며 대체 이 짓거리가 뭐냐고 악동들을 꾸짖는다. 어차피 같이 가봤자 이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혼자 보냈다는 악동들을 질책하는 양쿠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했다. 어차피 도움이 안될테니.라며 소중한 사람들의 곁에 있는 것을 포기한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안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려운 순간에 함께 하는 것이 가족이고 친구인 것일텐데 말이다.
뒤늦게 쿠마, 우치, 노다가 달려오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사실 가슴 벅차게 뿌듯하고 기특했을텐데, 양쿠미는 어줍잖은 칭찬 대신, 너희들, 늦었잖아.라고 말하고, 이에 우치가 시끄럽다고 응수하는 것으로 처리한 것이 상당히 쿨했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에서 악동들이 양쿠미에게 시끄럽다고 말하는 장면이 꽤 여러 번 등장하는데, 대부분 쑥쓰러움으로 인해 시끄럽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 말을 할 때마다 악동들과 양쿠미 사이에는 한 겹씩 신뢰가 더 쌓여간다는 느낌이다.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퇴학을 당해도 반성문을 쓰지 않겠다고 버티던 사와다가 장문의 반성문을 써서 교감에게 내민다거나 그간 양쿠미가 교실에 들어서서 인사를 해도 본척만척이던 악동들이 머슥한 모습으로 우물쭈물 답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기분 좋은 장면.
3화.
우치와 유사한 인상착의의 남자에 의한 연쇄날치기 범행이 계속 되고 우치가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우치가 학교에 제대로 나오지 않자, 우치를 걱정한 나머지 악동들과 양쿠미는 잠복 끝에 연쇄날치기범을 직접 잡아서 경찰에 넘긴다. 한편 우치는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인정받는 다른 반 학생을 폭행했다고 해서 질책을 당하자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한다. 양쿠미는 어렵게 뒷바라지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우치를 질책하지만, 실은 우치는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해서 학교를 그만 두고 일하려는 생각을 했던 것. 다른 반 학생의 폭행 건은 그 학생이 동물을 학대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 양쿠미에 의해 무마되고 우치는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3화의 경우는 상당히 뻔하다고 할까, 전형적인 내용이지 않았나 싶은데, 부모를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 정도가 마음에 남았다고나 할까.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우치에게 부모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몰아붙이는 양쿠미에게 개인적으로는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했는데, 그래서 잔뜩 반항적인 3학년 D반 악동들이 이것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신기했다.
사와다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뒤돌아서서 피식거리며 양쿠미를 재미있게 생각하고 조금씩 신뢰를 드러내는 장면이 잔재미를 주는 화였다.
4화.
미인인 영어 교사 후지야마 선생은 교직에 대해 별 사명감이 없는 교사로 방학 때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밤에 술집에서 호스티스 아르바이트를 하며 수업에는 불성실하게 임한다. 후지야마 선생을 좋아하는 노다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목걸이를 사서 선물하기도 하는데, 우연히 후지야마 선생이 호스티스로 아르바이트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선물한 목걸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교감에게 익명의 제보 메일을 보낸다. 제보 메일을 보낸 것이 노다임을 짐작한 양쿠미는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해코지를 하려고 한 노다의 행동을 꾸짖고 후지야마 선생을 퇴직시키려는 교감을 막아선다. 후지야마 선생으로 인해 학생들의 성적이 향상되고 있다며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하는 양쿠미에게 교감이 내건 조건은 3학년 D반 학생들의 평소 성적으로 보았을 때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3학년 D반 전원이 중간시험의 영어 점수를 30점 이상 받는 것.
후지야마 선생만이 아니라 급우 노다를 위해서 3학년 D반 악동들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에 감동을 받은 후지야마 선생 또한 처음으로 교사로 계속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굉장히 감동적인 에피지만, 가장 논란이 많을 수 있는 에피이기도 하다. 일단 교사가 호스티스 알바를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면 한국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었을텐데, 아무리 조건이 붙었다고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이런 식으로 무마되는 것이 가능한가 싶은데, 일단 이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코지를 하니 마음 아프던 것이 없어졌냐며 그렇다고 한다면 넌 사람을 좋아할 자격이 없다고 양쿠미가 노다를 질책하는 장면이 일단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그 마음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행동에 옮길 것인지는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던 않던 간에 그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하게 대한다는 것, 어른들도 잘 못하는 것인데 아직 나이 어린 학생들이 성숙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양쿠미에게 질타를 당한 뒤 자신의 잘못을 책임지려는 노다의 노력과 행동이 참 멋지다 싶었다.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수학교사인 양쿠미가 중간시험 전까지 방과 후 영어 보충수업을 해주겠다고 하지만 전혀 보충수업을 받을 생각이 없는 3학년 D반 급우들에게 노다는 머리를 숙여 보충 수업에 참석해줄 것을 부탁하고, 쿠마가 29점을 받아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후지야마 선생이 퇴직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자 제보 메일을 보낸 것이 자신임을 후지야마 선생과 교감 앞에서 밝히고 후지야마 선생에게는 머리를 숙여 사과하고 교감에게는 후지야마 선생이 퇴직하게 되면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책임져야 하냐며 후지야마 선생이 퇴직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사정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도 자신의 잘못을 밝히고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노다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후지야마 선생과 더불어, 책임감을 느끼는 친구 노다를 위해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알파벳부터 공부하는 3학년 D반 악동들의 모습 또한 잊기 어렵다. 친구를 위해서 필요한 경우 한다면 한다는 녀석들. 이런 친구들을 갖고 있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고 뿌듯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후지야마 선생이 이들의 이런 마음에 새삼 교직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않나 싶다.
여기서 마음에 걸리는 문제는, 쿠마를 제외한 전원이 30점을 넘은 가운데, 29점이라는 자신의 점수를 확인한 쿠마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급우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상황, 그 분위기에서 쿠마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 대체 왜 쿠마가 미안해 해야하는 것일까.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것은 후지야마 선생과 노다일텐데.
어쩌다가 쿠마가 미안하다고 급우들에게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일까.
여기서 살짝 일본의 전체주의 문화를 떠올리며 무섭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상한 걸까.
후지야마 선생과 노다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애초에 양쿠미가 학생들과 상의없이 교감이 내건 그런 조건을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일까? 시험을 치고 30점 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양쿠미가 아니고 학생들일텐데. 물론 양쿠미가 그런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무시해버릴 수도 있긴 하지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교사의 퇴직과 친구의 자책감이 걸려있는데 나 몰라라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뭐 자신들에게 의미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는 좋지만, 함께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해낸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한 두명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애초에 전혀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던 사람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이걸 대체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뭐, 드라마는 드라마다운 결말을 준비했다. 후지야마 선생 대신 교감이 출제한 영어 시험 문제가 출제 오류로 인하여 복수 정답을 인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지고 그래서 쿠마의 점수가 최종적으로 31점인 것이 되면서 쿠마는 환희의 함성을 지르고 3학년 D반은 축제 분위기에 휩쌓이게 된다. 그럼에도 어쨌든 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던 쿠마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고 찜찜함으로 남는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흐름과는 상관없는 사소한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복수 정답인 문제는 발음과 관련된 4지 선다형 문제였는데, 사와다의 경우 100점을 받았다.
출제 오류로 인해 복수 정답인 문제에서 애초에 정답으로 인정된 항목을 용케도 골라 100점을 받았네.싶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둘 중 더 정답스러운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닌 데다가 너무 뻔한 문제여서 그 문제의 답이 복수 정답이라는 것은 100점을 받을 정도의 녀석이면 애초에 답안에 복수 정답을 기입하든지 쿠마의 성적이 문제가 되었을 당시 출제 오류를 곧바로 지적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해야할까.
참고로 출제 오류를 발견하고 지적한 것은 교장 선생님이었다.
<고쿠센>의 만화와 실사 드라마는 유사성을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사소한 부분까지 따지면 끝이 없겠지만, 중요한 부분만을 살펴보자면, 우선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만화의 경우 학원과 야쿠자 조직을 배경으로 한 연애물적 요소가 가미된 코메디물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드라마의 경우는 학원과 야쿠자 조직이 배경이 되고 코메디적 요소가 다분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장 드라마, 휴먼 드라마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만화는 웃자고 보는 내용인 반면, 드라마는 그저 웃고 치울 내용은 아닌 것이다.
또한 만화에서는 양쿠미가 가업(?)인 야쿠자 일에 개입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일정 정도 이상 개입할 분위기다. 그래서 만화에서는 학교와 관련된 내용과 조직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엇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 학생들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양쿠미네 조직이 알게 모르게 꽤나 지원을 한다.
반면 드라마에서는 양쿠미는 교사의 길을 걷기 위해 가업(?)에는 손을 대지 않을 분위기이고, 양쿠미의 조부도 조직을 최소한 세습체제로 이어갈 생각은 없는 듯하다. 그리고 드라마의 경우 양쿠미네 일가는 양쿠미의 가족으로서 심리적인 지원과 조언을 해주는 역할만을 하며 조직의 힘을 이용해 학교나 학생과 관련된 문제의 해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없다.
또, 만화에서는 사와다 신이 양쿠미를 좋아한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친구들도 신과 양쿠미의 교제를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 여러 번에 걸쳐 등장한다. 빨간 색으로 염색한 머리 때문에 양쿠미네 조직에서 빨간 사자 대장이라고 불리는 사와다 신이 장래에 4대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암시가 여러 번에 걸쳐 등장하기도 한다. 양쿠미네 일가는 데릴사위가 대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졸업과 더불어 신이 양쿠미에게 고백을 하고 신이 법학부로 진학해 양쿠미네 조직의 변호사가 될 것을 선언하며 앞으로 두 사람 관계가 발전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반면, 드라마에서는 신과 양쿠미의 관계는 철저히 사제관계에 초점이 맞춰 그려진다. 물론 신의 태도는 양쿠미를 단지 교사로서 신뢰하고 좋아하는 것인지 연애감정도 섞여있는 것인지가 알쏭하기는 하지만, 그 감정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는 장면은 없다. 1기의 마지막 12화의 엔딩 부분에서 양쿠미에게 관심이 있는 남자들에게 자신도 라이벌이라고 신이 선언하는 장면을 제외하면은.
만화에서는 양쿠미와 신의 관계가 앞으로 발전할 것임이 비교적 확실하게 제시되고 있다면, 드라마에서는 1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양쿠미를 둘러싼 연애 관계는 완전히 열린 결말로 처리되는 느낌이다.
만화와 달리 드라마에서 커플 관계가 열린 결말로 처리되는 것은 세 가지 점이 작용한 듯 싶다. 한 가지는, 만화는 양쿠미와 사와다 신을 중심으로 한 러브 코메디적인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는 반면, 드라마는 사제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성장드라마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제지간인 양쿠미와 사와다의 커플 모드를 확실히 못 박는 분위기를 만들기에는 드라마의 전체적인 기조 상 다소 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만화에서는 양쿠미의 조직 일에도 신이 이래저래 연루되면서 양쿠미가 힘들 때 신이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기대는 상대가 되고 이런저런 일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대화상대의 성격을 가진다. 즉 단순한 사제관계로 한정지을 수 없는 성격의 관계맺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드라마에서는 양쿠미가 조직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 문제를 중심으로 에피소드가 꾸려지고 그래서 양쿠미와 신의 관계맺음은 철저히 교사와 학생의 입장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양쿠미의 입장에서 신을 자신의 제자가 아닌 연애 상대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기 어렵고, 그래서 신이 막연하게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정도의 분위기를 넘어서는 관계로의 전개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드라마의 경우, 사와다 신을 포함한 1기 악동들의 졸업 이후, 2기와 3기를 제작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 양쿠미와 사와다 신의 커플 모드를 확실히 못 박아 버리게 되면, 2기와 3기에도 졸업한 사와다 신이 지속적으로 등장해주어야 하는데, 사와다 신을 연기한 마츠모토 준이 2기, 3기에 계속적으로 출연할 수 있을 것인지가 불투명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본편의 마지막 편인 12화에서 연애 관계를 열린 결말로 처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마저도 2기를 꾸리며 1기를 정리하는 졸업식편을 통해 사와다 신이 아예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으로 처리해 정리해버린다. 마츠모토 준을 양쿠미의 연애 상대로서 단역으로 출연시키기는 무리였을 것이고, 그렇다고 마츠모토 준의 배역 비중을 확 늘린다면 2기와 3기의 성격 자체를 성장 휴먼 드라마가 아니라 러브 코메디로 전환시켜야 하는데, 1기 고쿠센이 인기를 얻었던 기본 기조를 생각했을 때 2기, 3기에 그런 식의 전환을 선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는 1기, 2기, 3기에 각각 경찰, 이웃 학교 교사, 양쿠미 학교 담당 의사(교의)가 양쿠미의 짝사랑 상대로 등장한다. 이 중 만화와 어느 정도 관련성을 보이고 있는 캐릭이 1기의 경찰인 시노하라 씨. 만화와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고 해봤자 이름 정도가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양쿠미가 연애에는 서툴기 짝이 없는 데다가 경찰과 야쿠자 집안의 손녀라는 것이 물과 기름과 같은, 양쿠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미오와 줄리엣 관계인지라 전혀 관계에 진전이 없다는 설정이다.
2기, 3기의 교사와 의사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입장이 아님에도 진전이 없긴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반면, 만화에서의 시노하라는 양쿠미 조부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조직의 변호사로 오래도록 일해왔으며 양쿠미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양쿠미와 결혼을 하게 되면 양쿠미 조직의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는 점 때문에 그것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인지를 망설이는 우유부단함을 보이는 인물로 나온다. 결국 부친의 병환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양쿠미와 양쿠미 조직과는 결별을 고하게 된다.
양쿠미가 교사가 된 계기도 만화와 드라마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드라마의 경우에는 양쿠미의 부친이 생전에 교사였기 때문에 양쿠미가 오랜 꿈으로 교사가 되기를 원해왔다는 점이 강조되는 한편, 만화의 경우는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문제아로 찍혀 눈밖에 나 박대를 당하고 어린 나이에 조직에 의탁하게 된 조직원들을 보며 학교에서 문제아, 불량학생들로 찍힌 학생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실 이 부분은 만화의 설정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드라마에서 왜 이부분을 달리 처리했는지는 살짝 이해가 안간다.
한편, 만화의 경우는 양쿠미네 학교의 교사들이 다소 엽기성을 띠고 있어서 그렇지. 전반적으로 학생들에 대해 나름의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드라마에서는 사와타리 교감을 중심으로 문제아라고 찍힌 학생들은 아예 내놓고 박대하는 교사들을 상대로 양쿠미가 힘겹게 학생들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분위기로 그려진다. 뭐 조금씩 다른 교사들도 양쿠미에 의해 분위기가 변화되어 가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점이 드라마에서 다소 불만스러운 부분이기도 했는데, 아주 특별한 한 명의 훌륭한 교사의 고군분투기는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아주 특별한 한 명의 훌륭한 교사를 만나지 못한 학생들에 대한 안스러움을 불러 일으킨다고 할까. 그리고 아주 특별한 한 명의 훌륭한 교사는 아니지만, 나름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대다수의 많은 교사들의 존재를 무시, 간과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나 할까. 학생들은 많고 세상은 한 명의 훌륭한 교사, 한 명의 위대한 인물에 의해 바뀌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뭐, 드라마니까. 그래도 살짝 씁쓸해지긴 한다.
1기의 배경이 되었던 시로킨 고교는 양쿠미가 부임한지 2년 만에 도산해 버렸다는 설정 하에, 2기에서는 쿠로킨 고교가 배경이 된다. 시로킨 고교 도산 후 쿠로킨 고교로 자리를 옮긴 사와타리 교감은 쿠로킨 고교의 문제반을 담당할 교사로서 요청한 무술 고단자인 남자 교사 대신 배정 과정에서의 사무 착오로 양쿠미가 쿠로킨 고교에 나타나자 경악하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 수 없이 양쿠미에게 문제반을 맡기게 된다. 2기 에피의 막판에 학생들이 일으킨 소동에 책임을 지고 졸업식 전날 양쿠미가 사직을 하게 되는데, 우여곡절 끝에 사직이 철회되는 것은 아니지만 졸업식장에 양쿠미가 참석하게 된다.
3기는 아카도 고교를 배경으로 하는데, 2기 마지막 에피에서 양쿠미가 졸업식장에 참석하는 것을 지원한 사와타리 교감이 쿠로킨 학교에서 해고된 뒤 시로킨과 쿠로킨에서 문제반을 성공적으로 지도했다는 경력으로 인하여 아카도 고교에 스카웃되어 문제반 담당이 되는데 첫날 완전히 묵사발이 되어 교실에서 물러난다. 학교에서의 입지가 위태로와진 사와타리 교감은 수소문 끝에 양쿠미를 찾아내어 아카도 고교로 데려와 문제반을 맡긴다.
1기에서는 양쿠미가 야쿠자 집안의 손녀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 위험 요소로서 계속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반면, 2기와 3기에서는 여전히 양쿠미 집안이 알려지면 안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1기에 비해 이 점이 차지하는 비중은 확연히 줄어들면서 주변화한 느낌이다.
2기와 3기에서도 양쿠미와 사와타리 교감의 신경전이 1기에 이어 이어지기는 하지만, 3기에 이르러서는 사와타리 교감이 직접 양쿠미를 수소문해 스카웃해올 정도로 양쿠미에 대해 상당히 지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기본적인 관계의 성격이 변화되고 사와타리 교감이 양쿠미의 집에 방문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3기의 마지막 에피에서는 양쿠미가 사와타리 교감에게 그간 학생들을 엄격하게 지도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학생들 또한 사와타리 교감에게 감사를 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1기에 비해 상당히 변화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양쿠미의 짝사랑 상대는 1기에서는 경찰, 2기에서는 맞은 편 학교 교사, 3기에서는 양쿠미가 근무하는 학교를 담당하는 의사로 직업이 변화되기는 하지만, 관계의 성격에 있어서는 1기에서 3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1기의 악동 중 하나로 가업인 라면집을 운영하는 쿠마는 3기까지 계속 이어서 출연하는데, 주로 양쿠미의 악동들이 문제가 생겨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고 양쿠미에게 알려주는 역할 담당인 듯 싶다. 쿠마는 1기의 5화에서 쿠마의 첫사랑으로 등장하는 여학생 아미와 결혼해 3기에서는 아이 아버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2기와 3기 악동들의 캐릭터성은 1기 악동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보고 돌아서면 기억이 안나는 캐릭들이 많다. 2기 악동들의 경우 문제반이라는 성격상 싸움을 부지기수로 하는 상황에서 한 명이 싸움에 무진장 약하다는 설정이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절친하던 5명의 악동 중 핵심 멤버인 카메나시 카즈야가 연기하는 캐릭과 아카니시 진이 연기하는 캐릭이 대립하고 카메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악동들 간에 반목이 계속되고 카메가 등교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카메가 연기하는 캐릭과 아카니시 진이 연기하는 캐릭이 성격 자체는 사와다 신과 다르지만 1기에서의 사와다 신의 역할을 반분하고 있는 느낌인데, 사와다 신의 흡인력과 무게감을 메우지 못한다.
3기에서는 타카키 유우야와 미우라 하루나가 연기하는 캐릭이 각각 파벌을 형성하며 반의 반목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기본 설정인데, 양쿠미와 더불어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결국 더할나위 없는 친구가 된다. 타카키 유우야와 미우라 하루나가 연기하는 캐릭은 2기의 카메나시 카즈야와 아카니시 진이 연기하는 캐릭을 복제한 듯한 느낌이고, 따라서 1기의 사와다 신의 역할을 반분한 느낌이다. 2기의 카메보다는 3기의 타카키 유우야의 흡인력이 조금 더 강력한 느낌이지만, 1기의 사와다 신의 흡인력에는 심히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반 전체의 활기를 표현하는 장면에서도 1기에서는 정말로 젊은 연기자들의 열기가 넘쳐난다는 느낌이었던 반면, 2기부터는 그야말로 마지못해 활기찬 척 연기하고 있다는 작위적인 느낌이 너무 강해서 보는 사람이 민망했다. 내용 또한 2기, 3기는 1기의 주제가 반복되거나 졸업장 받는 연습을 한다거나 면접장면을 연습한다거나 하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를 다루면서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또한 1기에서는 악동들이 사실상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거나 피치 못하게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2기와 3기에서는 경위야 어찌되었건 악동들이 사실상 꽤나 사고를 치고 다니고, 양쿠미 또한 1기에서는 물리적인 힘으로 상황을 해결하려는 것을 가능한 자제하려고 했던 반면, 2기와 3기에서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을 그다지 자제하려는 느낌은 아니다. 이 부분은 사실상 2기와 3기가 만화 원작과 더 유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만화에서는 양쿠미가 힘으로 해결하는 장면을 들키지 않으려고는 하지만 사실상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을 그다지 자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만큼.이라고 해야할까. 2기와 3기에서는 1기에 비해 양쿠미의 액션 씬이 훨씬 현란해졌다. 1기의 경우 사실 양쿠미의 액션 장면은 쓴웃음이 나올 정도로 꽤나 엉성했다.
3기까지 방영된 실사 드라마는 시청률은 2기, 3기가 더 높았던 것 같지만, 작품성은 2기와 3기가 1기를 따라올 수 없다. 2기와 3기는 거의 1기의 변형에 우려먹기 정도의 느낌이라고 할까. 1기를 보지 않고 2기나 3기만을 보았다면 조금은 더 몰입할 수 있고 재미를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2기와 3기의 작품 완성도와 재미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하기는 어렵고, 1기를 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화의 경우는 양쿠미와 사와다 신이라는 두 명의 캐릭을 중심으로 한, 투 톱 구성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드라마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양쿠미를 중심으로 한, 원 톱 구성이다. 드라마에서는 사와다 신의 비중이 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반면 양쿠미네 일가나 학교 교직원들, 양쿠미 반의 악동들의 비중이 골고루 늘어나며 안배된 형태이다. 물론 사와다 신의 비중이 악동들 중에서는 가장 크기는 하지만.
드라마의 경우, 사와타리 교감의 비중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주목할만하다. 만화에서는 완결 에피까지 줄창 등장하는 사와다 신이 드라마에서는 2기부터 등장하지 않고, 주인공인 양쿠미와 교체되기 어려운 양쿠미네 일가를 제외하고는 출연진이 전면적으로 교체되는데, 그 와중에 3기까지 계속 큰 비중을 가지고 고정 출연하는 캐릭이 나마세 카츠히사가 연기한 사와타리 교감이다.
사실 사와타리 교감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고쿠센의 재미가 급격히 반감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마세 카츠히사가 연기하는 사와타리 교감의 비중은 실사 고쿠센 전반에 걸쳐 결정적이지 않나 싶다.
드라마에서 사와다 신의 전반적인 비중 자체는 줄어들었지만, 그 흡인력과 영향력은 만화에 비해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만한데, 여기에는 마츠모토 준이라는 사와다 신을 연기한 배우의 호연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와다 신의 캐릭은 드라마와 만화가 유사하면서도 살짝 차이가 있는데, 드라마에서의 사와다 신이 만화에 비해 훨씬 더 냉소적이고 양쿠미에 대해서도 초반에 훨씬 더 적대적인 느낌이다.
사와다 신은 말수가 지극히 적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캐릭이라는 설정인지라, 짧은 대사와 작은 움직임, 미묘한 표정 변화로 사와다 신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내면을 표현해내야 하는데 마츠 준이 이것을 무진장 잘 소화해내었다. 이 역으로 마츠 준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 그럴만 하다고 생각한다. 덕분이라고 해야할까, 만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을 새로 만들어내야 했던 드라마 2기와 3기의 악동들 중에서는 사와다 신의 캐릭성과 흡인력을 넘어서는 악동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마츠 준은 고쿠센에서의 호연으로 큰 인기를 얻고 연기자로서 승승장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마츠 준과 더불어 <고쿠센> 1기에 이어 <꽃보다 남자>에도 출연하는 오구리 슌의 경우, <꽃보다 남자>에서 하나자와 루이 역을 연기해 큰 인기를 모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꽃보다 남자>에서는 오구리 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구리 슌은 <쿠도 신이치에게로의 도전장>이라는 명탐정 코난 1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실사 드라마에서 쿠도 신이치 역을 맡기도 했는데, 일본 추리 만화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와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 역을 <고쿠센>과 <꽃보다 남자>에 함께 출연한 마츠 준과 오구리 슌이 각각 맡아 연기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그런데 코난은 좋아하지만 쿠도 신이치는 별로 안좋아하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오구리 슌의 쿠도 신이치는 별로 매력이 없었다.
내 경우에는, 오구리 슌이 <고쿠센>에서 우치야마 역처럼 방방 뜨고 내지르는 역을 할 때가 하나자와 루이나 쿠도 신이치처럼 조용하고 침착한 역을 할 때보다 훨 매력적인 것 같다.
덧붙여 <고쿠센> 1기의 다섯 악동들 중 하나인 노다 역으로 출연한 나리미야 히로키는 마츠 준 주연의
<김전일 소년 사건부> 3기 불사접 에피에 게스트 캐릭으로 출연하기도 했었는데 <고쿠센>에서 다시 보게 되어 반가왔다. 그런데 나리미야 히로키는 이후 점점 마스크의 느낌이 변하고 있어서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딱 보고 나리미야 히로키를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작의 김전일 느낌을 가장 잘 살린 것은 도모토 츠요시이다. 보통 때는 약간 얼빵하고 띨띨하고 헐렁해보이는, 세련과는 거리가 있는, 그러나 사건이 발생하고 추리가 시작되면 영민한 눈매가 되는 느낌을 도모토 츠요시가 상당히 잘 살려내었다. 만약 도모토 츠요시가 계속 소년의 느낌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드라마 김전일 시리즈는 계속 도모토 츠요시 주연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1995년과 1996년에 드라마 1기와 2기가 제작되고 1997년에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 2001년 3기가 제작될 무렵에는 도모토 츠요시가 이미 소년의 느낌을 벗어버린지라 어쩔 수 없이 2대 김전일이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도모토 츠요시는 최근 <33분 탐정>에서, 김전일은 아니지만, 탐정 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도 도모토 츠요시가 김전일 역을 맡았던 시리즈가 만화 원작의 느낌과 가장 유사성을 보인다. 어둡고 칙칙하고? 으시시한.
1대 김전일 시리즈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김전일의 호적수인 아케시 경감을 너무나 쪼잔한 인물로 그려내었다는 것. 이 점만은 정말 OTL.이다.
마츠모토 준이 김전일 역을 맡은 3기는 도모토 츠요시의 김전일 시리즈와 아예 과감하게 차별성을 기하기로 했는지, 전체적인 분위기도 원작의 분위기나 1, 2기의 드라마 분위기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훨씬 세련되고 도회적인 느낌이랄까. 그리고 꽤 스케일이 큰 에피들을 많이 다루었고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로 연출된 경우가 많았다.
마츠모토 준의 김전일 또한 원작의 김전일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왕자병이 좀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쿨한 캐릭이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마츠모토 준의 김전일은 김전일 아닌 김전일, 이름이 김전일, 킨다이치 하지메이기는 하지만, 만화 원작의 김전일, 킨다이치 하지메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느낌인데, 원작의 캐릭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마츠모토 준의 김전일 또한 김전일 아닌 김전일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내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3기는 이름과 에피소드 내용을 김전일 만화에서 차용하기는 했지만, 만화 원작과는 다른, 또다른 소년 탐정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본다면 별 거부감없이 나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지 않나 싶다.
역시나 원작의 켄모치 경부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나이토 타카시가 연기한 2대 켄모치 경부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정감이 가서 이 점도 2대 김전일 시리즈를 개인적으로 좋아한 이유가 되었다.
2대 김전일 시리즈에서 주목하게 되는 또 하나의 캐릭은 지옥의 광대, 타카토 요이치. SP 편과 마지막 러시아관 편, 두 에피에서 등장하고 SP편에서는 만화 원작의 이미지와 유사하게 앞가르마를 타서 앞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었는데, 마지막의 러시아관 편에서는 머리를 짧게 깎고 나왔다. 뭐 어느 쪽이든 원작 캐릭의 분위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2대 김전일 시리즈에서 등장한 게스트 캐릭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3대 김전일은 카메나시 카즈야. 흡혈귀전설살인사건으로 2005년에 SP 드라마 한 편만을 찍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카메의 김전일은 원작의 김전일과도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원작과 별개의 작품이라고 놓고 보아도 흡인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카메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특별히 싫어하지도 않지만, 마츠모트 준이 연기했던 캐릭을 이어받는 경우 카메의 흡인력이 심히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김전일도 그렇고, 고쿠센 2기에서도 1기에 마츠 준이 연기한 사와다 신의 캐릭성을 어느 정도 아어받은 캐릭을 카메가 연기했는데 마츠 준에 비해 무게감과 흡인력이 심히 떨어졌다. 전혀 다른 느낌의 연기자이니만큼 마츠 준이 연기한 캐릭을 어어받는 느낌의 캐릭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덧붙여, 밑에 어디선가의 포스팅에서도 끄적거린 적이 있었던 것처럼, 김전일로 등장한 마츠 준은 내 동기와 너무나 쌍둥이처럼 닮아 있어서 사실 좀 난감해하면서 보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금 더 몰입해서 볼 수 있었을텐데, 잘 아는 동기 녀석이 일본어를 말하며 드라마 내에서 돌아다니는 느낌이어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며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친구가 연기자인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가 출연한 작품을 볼 때 어떤 느낌일까 하는 점이 새삼 궁금해지기도 했다.
김전일에서의 마츠 준의 연기는 대체로 무난하다는 느낌이었다. 내지르는 발성이 다소 어색한 장면들이 몇 군데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그런데 실은 일본 연기자의 연기는 평가하기가 다소 난감하다. 한국인과는 다소 다른 감정 표현이나 발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적인 기준에서 연기를 평가하는 것에 다소 무리가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연기가 어색해서 봐주기 힘들다는 느낌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난 일단 손에 잡은 만화는 아무리 재미가 없어도 그 시점에 나와있는 부분까지는 일단 보는 스타일인데, 중도 하차한 만화가 세 개가 있다. <멋지다 마사루>, <아기와 나>, 그리고 <꽃보다 남자>!
<멋지다 마사루>는 일본 만화 특유의 엽기적 유머를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어서, <아기와 나>는 그 잔잔한 감동이 지루해서, <꽃보다 남자>는 전체 줄거리도 마음에 안들고 캐릭들도 마음에 안들어서 내동댕이쳤었다.
그러다가 결국 <꽃보다 남자>는 중국, 일본,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인기를 계속 이어가는 통에 궁금해져서 일단 참고 끝까지 한번 봐보자, 끝까지 보면 그 인기의 비결, <꽃보다 남자>라는 작품이 가진 매력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일단 일본판 드라마를 보았고 이어서 결국 원작 만화도 보게 되었다.
원작 만화를 보게 된 것은 순전히 드라마 캐릭과 원작 캐릭의 유사성과 차이점이 궁금해져서이고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는 아니었는데, 결론은 역시나 나하고는 안맞는 작품이라는 것. 끝까지 보는 것이 심히 고역이어서 끝까지 참고 다 본 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이건 인간 승리라고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등장하는 왠갖 캐릭터가 이렇게 하나같이 마음에 안들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 주인공인 츠카사를 능가하는 인기를 점하고 있는 하나자와 루이가 대체 어떤 캐릭일지 궁금했는데, 나로서는 정말 심하게 짜증나는 캐릭이었고 주인공인 츠카사와 츠쿠시 또한 루이 버금가게 짜증났다.
일드 <꽃보다 남자>와 만화 원작을 다 본 결과, 단 하나 이 작품을 본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면 마츠모토 준의 연기력에 감탄했다는 것 정도일까나. 사실 이 작품만 보았다면 마츠모토 준의 연기력에 감탄하지 않았을 것이고 츠카사라는 캐릭에 대한 짜증만 남았을 것 같다. 사실 <꽃보다 남자>에서의 마츠 준의 얼굴 또한 심히 마음에 안든다. 젖살에 빠진 것인지 통통하던 볼살이 사라진 데다가 눈썹을 심하게 다듬었는데, 덕분에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이 강해져서 마음에 안드는 츠카사 캐릭이 더 다음에 안들었다.
그런데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 <고쿠센>, <너는 펫>에서 <꽃보다 남자>로 이어지는 마츠모토 준이 출연한 드라마 작품의 흐름 속에서 너무나 다른 캐릭을 마츠 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화한 것에 놀랍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고, 이 작품들의 성격과 캐릭이 가지는 특성으로 인해 연기자라는 느낌보다는 아이돌이라는 느낌이 여전히 더 강하기는 하지만, 마츠 준의 연기력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느낌.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 <고쿠센>, <너는 펫>, <꽃보다 남자>, 그리고 이후의 <밤비노>까지 2001년 이후 마츠 준이 출연한 드라마가 만화가 원작인 작품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도 재미있는 점인데, 그래서 이 작품들을 차례로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뭐 일명, 마츠모토 준 스페셜?이라고나 할까.
날 보고 꼭 보란다, 영화관에 가서.
네네. 동감. <전우치>는 잘 될 거 같고, 뭐 보고 싶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도 같고,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의형제>를 더 기다리고 있다 했더니, 그건 또 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쿡쿡쿡쿡. 강동원이 <전우치> 찍었는데 괜찮을 거 같으니 보라고 알려줄 대상이 잘못된 거 같지 않은가.
쿡쿡쿡. 미치겠다, 정말.
내가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고 놀고 있는 걸 내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알면 초치기 밤샘하며 그러고 놀고 있냐며 날벼락이 날아올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아, 정말이지, 오늘도 초치기 밤샘이 예정되어 있다.
노는 것이 고프다. 뭐, 지금도 놀고 있지만.
어쨌든, 대학생이 된 사와다 신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드디어 진전도 있는 모양이다.
뭐, 팬 서비스 차원의 특별 연재인 것 같으니.
<고쿠센>을 보게 되었던 것은 워낙에 재미있다는 이야기도 얼핏설핏 많이 들었고 아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추천을 하기도 해서 만화와 드라마 중 만화광답게 만화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사와다 신.이라는 녀석이 독특한 캐릭터여서 그 맛에 당시 나와있던 부분까지는 다 보긴 했는데,
그토록 열광적으로 재미있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의 작품은 아닌 거 같은데.라며 갸웃거렸었다.
나중에 애니를 보고는 더 실망. 작화가 지나치게 날리신다. 요즘 시대에.
그러다가 정말 뒤늦게 실사 드라마를 보고 나서는 한참을 웃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고쿠센>에 대한 열광은 드라마에 대한 것이었구나.라는 뒤늦은 깨달음.
만화나 애니 원작이 있는 실사 드라마가 만화나 애니보다 압도적으로 재미있기는 힘든데, <고쿠센>은 드라마가 가장 낫다 싶었다.
물론 드라마보다 만화 쪽의 설정이 더 마음에 드는 부분들이 몇 군데 있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난 드라마 윈!을 판정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아~, 마츠모토 준이 사와다 신으로 나왔었구나.라는 것 때문에.
난 마츠모토 준이 나오는 드라마만 보면 계속 쿡쿡거리게 된다.
마츠모토 준이 좋아서가 아니라, 뭐 싫은 것도 아니지만서도,
내 동기동창 중에 마츠모토 준과 똑같이 생긴 녀석이 있다.
연락 끊긴지가 좀 되어서 지금은 어찌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학창시절 당시의 모습은 정말이지 마츠모토 준과 거의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꼭 닮았다.
만약 엇비슷한 나이였다면 혹시 잃어버린 쌍둥이 한쪽이 있지 않은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심지어 키도 똑같다.
언제적 마츠모토 준과 가장 닮았느냐 하면 <김전일 소년 사건부> 실사 드라마에서
김전일로 나왔을 때.
스타일도, 마른 것도, 웃는 것도 똑같다.
치열은 다르다. 내 동기녀석은 교정 필요성 없는 드물게 고른 치열의 소유자였다.
어쨌든, 그래서 마츠준이 나오는 드라마를 볼 때는 마츠준이 마츠준으로 안보이고
내 동기로 보여서 정말 난처하다.
굉장히 어색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마츠준 드라마를 볼 때마다 좀 늦게 태어났더라면 내 동기 녀석도 연예계 쪽과 연이 닿았으려나 라는 생각을 해보곤 하는데,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일단 끼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한국 최정상급으로 인정을 받았었기 때문에, 굳이 스트레스 받으며 연예계 쪽을 기웃거리지는 않았을 듯 싶은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니까.
하여간. <고쿠센>은 드라마. 그것도 1기.가 최고였다. 딱, 12회 본편까지. 졸업식 편은 너무 늘어졌다.
난 오구리 슌도 <꽃.남>에서보다는 <고쿠센>때가 좋았고,
교감 선생님 연기에도 필 꽂혔었다. 이 분 정말 재미나는 분인 거 같다.
물론 양쿠미 역을 맡은 나카마 유키에도 좋았고.
그.러.나. 말이지.
대학생이 된 사와다 신이 나오는 SP만화는 정말 보고 싶단 말이다. OTL.
주인공들이 워낙 삽질을 해주시는 통에 난 사실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큰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래서 주인공들의 집안과 관련된 저주와 얽혀있는 두 쌍의 곁다리 커플에 오히려 더 정이 간다.
저주에 관련되어 있는 두 쌍의 곁다리 커플이란 용신 커플과 용신의 저주를 받아 최초로 여자주인공네 조상을 섬기게 된 남자주인공의 조상과 그 섬김을 받게 된 여자주인공의 조상 커플이다. 커플이라고 표현했지만, 용신 커플도, 주인공들 조상 커플도 만화 내 현실에서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상황이나 관계는 아니다. 용신 커플은 용과 인간이기에 살아 생전에 해피엔딩일 수 없었던 사이고, 조상 커플은 신분 차이로 말미암아 평생 주종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사이다.
두 커플의 여자들이 각각 용신과 남자주인공의 조상을 사랑하면서도 모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나름 행복하게 천수를 누리고, 용신과 남자주인공의 조상 또한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지켜주면서 나름 행복했노라는 식으로 그려진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 로즈가 잭이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해준 것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잭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켜 잭을 평생 마음에 담고서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천수를 누린 것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사랑의 모습이 한 가지는 아니니까, 그런 사랑도 있겠지.라고 이해하려고는 하는데,
<타이타닉>에서는 한 사람이 죽었으니 어쩔 수 없다쳐도,
<사랑의 포로>에서의 두 커플은 도망을 가든지 해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왜 잘 먹고 잘 살면 안되는지가 살짝 납득이 안되기도 한다.
막강파워 용신네 커플도 그렇고, 조상 커플네도 용신과의 계약으로 말미암아 가문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가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둘이 도망가서 살아도 혈통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고. 다른 가족들이 다 죽고 없으니 명문가의 이름을 이어간다는 부담만 떨치면 오히려 둘이 도망가기에는 더 홀가분한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난 <사랑의 포로>에서는 주인공들보다 사이드 스토리로 등장하는 곁다리 두 커플에 대해 훨씬 정이 간다.
* <택틱스>에서도 백사의 신통력의 보호를 받는 집안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정말 비극이고 끔찍했다. 대체 그 집안 사람들은 왜 백사를 받아들여 비극을 자초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물론 재물에 눈이 멀어서지만, 그래도 어떻게 대대로 장남이 인간과 결혼을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백사를 아내 삼아 모시는 계약(?)을 받아들였는지 원.
또, 보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어떤 맥락 속에서 나오는 표정이나 감정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이쁜 척, 귀여운 척, 멋진 척, 심각한 척하고 나오는 장면을 맞닥뜨리게 되면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이 되지는 않기 때문에 어색하고 괴리감을 느끼게 되곤 한다.
CF모델이 제품의 기능이나 성능을 '보장'하는 식의 멘트가 많은 CF에는 특히 거부감이 생기곤 한다. 다양한 동종 제품을 사용해보고 정말 이 제품의 기능이나 성능이 타사 제품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자신이 보장할 수 있어서 해당 CF모델을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CF모델이 마치 자신이 해당 제품의 기능이나 성능을 보장할 수 있는 것 같은 멘트를 할 때 CF모델로 나선 사람의 인기에 편승해 제품의 기능이나 성능을 과장하는 것 같아서 불편해진다.
유명인, 인기인을 CF모델로 내세우는 것은 주의집중 및 각인효과 때문일텐데,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목적에 충실해서, CF모델에게 해당 제품의 기능이나 성능을 '보장'하는 것 같은 멘트를 하도록 하기보다는 특정한 기능이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을 알려주고 보여주도록 하는 선에서 머물러주었으면 싶다.
그래서 난 감정적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진기를 의식해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보다는 자연스런 스냅사진 같은 느낌의 CF를 더 선호한다. 그러나 자연스런 스냅사진 같은 느낌의 CF는 강한 각인효과를 유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CF로서의 효용이 떨어지기 쉽고, 아마도 그래서 과장되고 작위적인 느낌의 CF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CF는 보는 사람이 그 CF를 마음에 들어하고 좋아해야만 성공인 것은 아니니까.
CF의 목적은 상품에 대해 보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하고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그 CF 자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더라도 확실한 각인 효과를 거둔다면 성공이라고 평가될 것이다. 물론 단순히 관심을 가지고 기억할 뿐만 아니라 호감을 가진다면 금상첨화일테고.
어쨌든. 그래서 예전에 누군가가 강동원 나오는 CF도 2시간 연속은 끔찍하다는 말을 한 것을 본 순간,
저런. 난 강동원 나오는 CF도 대개의 경우 15초도 견디기 힘든데.라는 말이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CF모델로서 강동원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같은 경우, 강동원 나오는 CF"도" 그렇다는 거다.
내 경우, 강동원의 CF 중에 CF 자체도 마음에 들면서 제품의 각인효과도 높았던 CF로는 MP3폰 CF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일단, CF가 담아내고 있는 상황에 새삼스레 감정이입이 필요없었기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은 마음으로 볼 수 있었고. 20대 젊은이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기에.
광고가 발라드 버전과 락 버전, 두 가지로 제작되었고 도입부가 같았기 때문에 이번에 나오는 것은 발라드 버전일까 락 버전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 흥미진진해하며 주의를 기울이고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발라드 버전, 락 버전 모두에서 강동원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아서 어, 저 친구 춤이 되잖아.라며 재미있게 지켜보았던 것 같다.
자연스러운 가운데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의외성으로 인해 CF 자체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생기지 않으면서도 CF에서 홍보하려고 하는 상품에 대한 각인 효과도 높았다고나 할까.
유사한 이유로 내가 마음에 들어하면서도 주의를 기울여 집중해 보았던 CF로는 박신양씨가 펜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양복 CF와 한석규씨가 스님과 대나무숲을 거닐던 핸드폰 CF 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박신양씨가 펜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양복 CF는 회사 입장에서는 별로 재미가 없었던가 보다. 펜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활동성이 보장되는 양복이라는 특징을 아주 잘 부각시켰다고 난 생각했었는데, 활동성이 부각되다보니 고급스러운 제품이라는 인상이 약해지는 바람에 회사가 지향하는 제품 이미지와는 거리가 생겼다는 것 같다. CF의 세계란 참 오묘한 세계인 것 같다.
그림 작가는 시미즈 아키.
<백기도연대>는 만화로 정말 심히 보고 싶다.
검색하다가 원작가 쿄고쿠 나츠히코가 쓴, 추젠지들이 나이 든 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 있다는 내용을 보았다.
추젠지는 여전히 현기증언덕에 살고 있고, 에노키즈는 재벌 회장이, 기바는 경시청 고위관료가 되었고, 세키구치는 죽었다고 한다.
뭐 나이 든 후니까.
그렇지만, 대체 얼마나 나이가 든 후인지.
이들의 세번째 이야기인 <광골의 꿈> 번역판이 2006년에 나온 이후, 네번째 이야기인 <철서의 우리>도 아직 번역판이 안나오고 있는데.
난 아홉번째 이야기인 <쟈미의 물방울>이 심히 보고 싶다.
10년 안에 <쟈미의 물방울>을 번역판으로 볼 수 있을까? OTL.
* <철서의 우리> 번역판이 2010년 3월 발행될 것이라는 출판사 측의 공지가 최근 있었다. 재작년부터 한 계절, 두 계절 미루어져온 약속이 이번에는 지켜지길 바란다.
만화에서는 토마가 참 쿨한 성격인데, 실사에서는 냉철하긴 하지만 숙기 없는 남학생으로 나와서 만화에서의 성격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쉬운 느낌이었다. 또한, 만화에서는 토마가 나름의 확고한 생각이 있어서 일본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설정이었는데 실사에서는 돌아오고 싶고 다시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토마 스스로 그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수학 연구를 계속 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는 약간은 아슬아슬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만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토마와 가나의 커플모드를 실사에서는 다소 강화시켰다.
뭐 다른 건 그렇다치고, 나로서는 이건 정말 유감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세 장면이 실사에 등장한다.
먼저, 토마를 데리러 온 로키와 동행했던 에바가 옥상에서 토마를 밀어서 떨어뜨리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된다. 물론 에바는 로키를 훨씬 더 아끼긴 하지만, 토마 또한 아낀다고 생각하는데, 한 순간이나마 토마를 죽이려고 한다는 건 정말이지. 이건 아니잖아.싶은 장면이었다.
두번째로는 벚꽃과 관련된 대화를 만화에서와는 다른 내용의 에피와 연결시켜 드라마의 마지막 엔딩 장면으로 처리했는데, 만화에서 그 부분의 대사들이 주던 장면의 감동을 살려내지 못했다. 만화에서의 벚꽃과 관련된 대화는 아직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러나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그래서 빛나고 흥미진진하고 가슴 벅찬 상태로서의 토마와 가나의 관계, 그리고 고등학생 시기라는 학창시절이 가지는 의미를 함께 담아내고 있었는데, 실사에서의 이 부분의 대화는 만화에서의 감동을 거의 1/10도 담아내지 못했다. 저게 대체 뭔 얘기래?싶은, 만화를 본 사람은 OTL할 수준.
세번째로는 학원제 관련 에피에서 토마가 같이 가 주겠다는 가나의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물건을 사러가고 토마의 팔을 잡는 가나의 손을 떼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이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만화에서는 나중에 토마가 직접 자신의 감정을 가나에게 설명한다. 이제까지는 늘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서 세상과 접촉해왔는데 학원제 준비를 하는 동안 바깥세상이 점점 자신의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느낌이어서 그런 것에 익숙치 못해 잠시 혼자 있고 싶었다고. 그리고, 그래서 힘드냐는 가나의 물음에 토마는 활짝 웃으며 아니라며 이상하게도 즐겁다고 말한다.
난 만화를 볼 때 이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내가 토마와 같은 스타일이기 때문에 토마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난 토마처럼 내 페이스와 무관하게 세상이 밀려드는 것이 즐겁기까지 한 것은 아니고 가끔씩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지만 말이다. 가끔씩은 자극이 필요해.랄까.
그런데 실사에서는 토마가 자신의 감정을 직접 설명하는 장면이 아예 없고, 가나의 아버지와 부하 형사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어설프기 짝이 없는 간접 설명을 시도하는 장면으로 대체되는데, 만화 장면에서의 느낌이나 내용과는 크게 괴리가 있다.
정말, 실사. 뭐냐고.
왠만하면 그냥저냥 즐겁게 보는 편인데, 만화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을 다 망쳐놓고.
아예 다루지를 말든지.
정말이지 실사, 감정 생기게 한다.
* 실사 화별 내용
1화. 패러글라이딩의 사고와 관련된 에피
2화. 라이덴병 등신대 인형이 등장하는 에피
3화. 학원제 관련 에피
4화. 로키가 토마를 데리러 온 에피
5화. 가짜 스토커 사건을 벌이는 여배우와 서스펜스 광 형사가 등장하는 에피
6화. 가나가 과거로 타임슬립하는 에피
7화. 푸앵카레 추측과 관련된 수학자 해적이 등장하는 에피
8화. 연속절도범의 범행으로 위장해 완전범죄를 꾀하는 범인이 등장하는 에피
9화. 가나의 타임캡슐과 관련된 에피
10화. 모의재판 관련 에피
<사랑의 포로>였던 것 같다.
난 기본적으로 추리, SF장르 취향이고, <풀 메탈 패닉 후못후>보다는 <풀 메탈 패닉 더 세컨드 레이드>쪽이 입맛에 맞는 취향이다. 그렇지만 가끔 <더 세컨드 레이드>보다는 <후못후>가 땡기는 기분인 날이 있다. 이런 날 가끔씩 들쳐보는 만화 중의 하나가 각종 고전적인 동화들의 짬뽕이기도 한 <메르헨 프린스>다. 4권으로 깔끔하게? 예전에 완결되었다.
마법에 걸려 종종 몸이 성인화하는 마법나라 왕자님이 인간세계로 와서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와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소녀도 평범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명탐정 코난은 속은 고등학생인데 몸이 유아화하는 경우였다면, <메르헨 프린스>는 딱 그 반대의 경우다. 속은 어린애인데 몸이 종종 성인화하는 것이다.
<메르헨 프린스>를 보다보면, 속은 고등학생인데 몸이 유아화하는 경우는 애절한 이야기지만, 속은 어린애인데 몸이 성인화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 사람들에게.
몸은 종종 성인화하지만, 속은 어린애인 녀석이 좋아한다며 애정공세를 하는데 이걸 어쩔 거냐고.
여주인공의 말을 빌리자면, 물론 좋아서 껴안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단지 좋아서 껴안는 거 이상 엉큼한 속셈이 없다는 것이 더 무서운 거다.
<나의 지구를 지켜줘>에서의 링은 몸은 어린애였지만 전생의 기억으로 인하여 속은 성인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메르헨 프린스>의 알램은... 참 난감하게 만들어주신다.
그런데 이 꼬맹이,
열심히 고민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참 이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성인화한 알램보다는 어린 알램의 작화가 훨 마음에 드는데, 어린 알램이 깨물어주고 싶도록 귀여워서 그 맛에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게 말이 돼? 싶어 쓴웃음을 지어가면서도 어쨌든 이 만화를 보고 나면 나 같은 경우 기분전환은 된다.
우편물더미 속에 <마이 시스터즈 키퍼>라는 영화를 보여준다고 보러오라는 내용의 우편물이 끼여있었다. 최루성 영화를 피해다니는 나로서는 혹할 내용의 영화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좋은 영화일 듯 하다. 그러니까 난 좋은 영화일 것 같아서 피해다닌다는 얘기다. 좋은 최루성 영화는 정말이지 괴롭다. 여파가 너무 오래 간다.
만화 중에서도 <마이 시스터즈 키퍼>와 유사한 소재를 건드린 만화가 있었다.
추리물인 줄 알고 보기 시작했는데, 뭐, 추리물이기도 하다. 범죄자와 탐정이 등장하는 일반적인 추리물은 아니지만.
그래서, 어쨌든. 뒤통수 맞은 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면 또 끝까지 보기 때문에 끝까지 보았다. 그것도 재미있게.
<스파이럴 - 추리의 끈>이라는 만화.
애니로도 만들어졌다.
주인공 아유무가 여러 면에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는데.
생명공학이라는 분야는 참 무섭다. 현재 생명공학의 수준은 한발한발 내디딜 때매다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는 책임감을 느껴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학문 간의 광범위한 융합과 간학문적 연계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니 생명공학이라는 분야에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사이보그화만해도 먼 미래의 이야기 같지만, 현재진행형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과, 또 인터넷과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휴대용 전자기기들.
몸에 심지 않았다 뿐이지 인체의 연장과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다.
CSI 마이애미에서였던 거 같은데, 클럽에 드나들 때 소지품을 지니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신용카드 번호를 확인하기 위한 칩을 몸에 심은 사람들이 나오는 에피가 있기도 했었다.
과학은 인간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아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지나치게 유물론에 치우친 생각인 것 같다.
과학에는 마음이나 윤리가 없다.
마음이 있고 윤리를 생각해야 하는 과학자고 인간이다.
인간은 과학기술문명을 딛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각자 자신이 꿈꾸는 Erehwon은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봐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Erehwon은 어떤 모습인가?
유토피아? nowhere? now here?
몇 년 전까지만해도 now here를 딛고 서서 nowhere일지도 모르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고 했겠지만......
그래도 이 공간 이름이 Erehwon인 것을 보면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정말 우리 모친 때매 내가 못 살겠다.
하여간. 정장 코드가 요구되는 직장에서 근무하는 남성들의 복장에서 변화의 여지를 줄 수 있는 요소는 참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넥타이가 포인트로 떠오르는 듯 싶다. 물론 최근에는 와이셔츠의 디자인이나 색깔 등도 많이 다채로와지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넥타이를 잘라라>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남성들을 대상으로 남성성의 과잉화에서 벗어나 양성성을 추구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메트로섹슈얼이 되자고 주장하는 책이라고 대략 요약할 수 있지만, 필자가 남성 쥬얼리 회사를 운영하는 탓에 책의 실제적인 내용은 외형적인 부분의 치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이다.
어쨌든. 책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넥타이를 자르라는 표현은 정말로 넥타이를 자르라는 것이 아니라 넥타이부대 등과 같은 용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남성들의 옷차림이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넥타이를 자르라는 말로 정형성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상징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1%의 어떤 것>을 다시 보는데, 강동원이 일반적으로 창끝과 같이 뾰족하게 되어 있는 넥타이가 아니라 수평으로 반듯하게 잘린 넥타이를 매고 나온 것이 눈에 띄는 거다. 푸핫. 정말로 넥타이를 잘랐구나.
시간 순서로 보면 실은 넥타이를 자르라고 역설하고 있는 책보다 강동원이 수평으로 반듯하게 마름질된 넥타이를 매고 나온 것이 먼저이기 때문에 넥타이를 자르라는 책으로 인해 넥타이를 자른 것은 아닐 게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넥타이를 자르라는 책이 떠올라서 혼자 한참을 웃었다. 진짜로 잘랐어.라며.
개인적으로는 수평으로 마름질된 넥타이보다는, 그것도 꽤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매직>에서의 민소매 와이셔츠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물론, 이 때도, 이 친구, 넥타이만이 아니라 와이셔츠 소매도 잘랐구나.라며 웃었다.
사실 이 또한 책보다 소매를 자른 것이 먼저지만 말이다.
레드카펫 행사만 있고 나면 파격 노출 의상에 초점을 맞춘 기사들이 많아지곤 한다.
그러다보니 레드카펫 행사는 누가누가 더 많이 파격적인 노출을 하나를 경쟁하는 행사인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뭐 별로 상관할 바도 아니고 관심도 없지만서도, 충격적인 파격 노출이 아니면 눈길을 끌만한 개성이 그렇게도 없나 싶어 살짝 안타깝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파격 노출도 한계가 있을텐데,
넥타이를 자르는 방법 쪽을 좀 더 궁리해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기사도 파격 노출보다는 독특하게 자른 넥타이 쪽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좀 더 재미난 기사거리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초장부터 생중계라서.라며 레드카펫에 선 사람들을 재촉해 시상식장으로 들여보내더니,
생방송 시간 관계상.이라는 말이 체감빈도 백만번쯤 나오며 시상자와 수상자의 말을 재촉한다.
생방송 진행을 매끄럽게 이끈다는 것이 무진장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서도,
진행자도, 시상하러 나온 사람도 참 많이도 버벅거린다.
백만년만에 보았는데 시상 하기 전 시상하러 나온 사람들 간에 주고받는 멘트도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 지나도 어쩜 그렇게 변함 없이 한결 같은지.
썰렁한 칭찬과 농담. 어설픈 근황 묻기.
뭐라고 상대에게 말을 던져 놓고는 다음 진행 순서 살피느라고 자기 자신부터 제대로 상대가 답하는 말을 듣지도 않는다.
뭐라 말해도 상관없는 거다.
뭐라고 말하든, 말이 끝나면, 네, 그럼 다음 순서는...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부터 한 개도 재미없으면서, 재미있는 척조차도 못하면서, 이걸 시청자보고 재미있게 보라고 방송을 하는건가?
그러면서 영화인들의 축제란다.
대체 어디가?
후보작으로 선정되지 않은 작품 관계자들은 참석도 않는다.
생방송 시간 관계상 재촉을 당한 시상자들, 수상자들,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한다.
대체 어디에서 축제다움을 찾을 수 있는가?
참석자들의 화려한 의상?
영화제만 끝나면 참석자들의 의상 순위매기기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가 갑자기 납득되어버린다.
참석자들의 의상과 누가 상 받았다는 것 외에는 기사화할래야 기사화할 내용이 없지 않은가?
좀 좋아지려던 기분이 다시금 깔깔해진다.
그냥 시상식이라고만 하고 축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는 시청자에게 쓴웃음을 덜 짓게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인간이 담긴 채 발견되는 상자 또한 중의적으로 가리키고 있지만.
한편, <공각기동대>의 원제는 Ghost in the Shell로, 이는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심신이원론적인 관점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Ghost in the Machine이라는 문구의 변형으로 이해되고 있다.
Ghost in the Machine에서의 고스트는 의식, 정신, 마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마인드를 의미하고 머신은 마인드가 깃들어 있는 몸을 의미하는데,
Ghost in the Shell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스트는 의식, 정신, 마음 등을 의미하고 쉘은 고스트가 담긴 그릇, 몸을 의미한다.
머신보다는 고스트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서양철학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공각기동대>에서도 쉘은 고스트를 담아내기 위한 용기에 불과하며 쉘에 불과한 몸은 얼마든지 수술을 통해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일종의 소모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애초에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개발되었던 인형사가 의식을 갖게 되면서 인간의 조건으로 의식의 존재를 내세우며 자신을 인간으로 선언하고 자신을 버그로 보고 말살하려하는 움직임에 대항해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기계 몸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면서.
이처럼 인간을 무엇인가를 담는 '상자'에 비유하는 <망량의 상자>와 고스트가 깃든 그릇, 용기(shell)로 보는 <공각기동대>는 일견 유사한 관점을 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특히 뇌만 살아있다면 그것을 담은 용기는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망량의 상자>의 미마사카 박사 같은 경우는 <공각기동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을 단순한 그릇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마사카 박사의 이런 관점은 주인공인 추젠지에 의해 부정된다. 추젠지는 상자 안에 담겨 있는 존재의 의식은 상자로서의 의식이며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아니라고 말하며 몸을 단지 의식을 담는 그릇으로 보는 관점을 부정한다. 미마사카 박사의 '상자'에 담겨 연명하고 있는 존재의 정체성은 인간 누구누구.가 아니라 상자, 의식을 갖고 있는 상자라는 것이다.
이는 몸이라는 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도록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몸과 마음을 분리해 이해하는 심신이원론적 관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체 몸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에게 몸이란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때로는 귀찮고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이리저리 메스를 들이대서 변형시키기도 하는 몸은
인간이 인간이도록 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내가 '나'로 존재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 공각기동대 TV판은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극장판에서 나타났던 몸과 마음에 대한 관점이 TV판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몸도 좀 안좋았고. 두통이 잦은 편이었는데 최근에는 빈도는 많이 줄어들었으나, 한번 두통이 시작되면 조금 오래가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이 공간에 가능하면 그러한 상태를 풀어놓아 전염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카테고리 이름에 강동원군의 이름을 끌어다 쓴 것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과 미안함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좀 전에 "강동원아 보고싶다"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이 공간을 찾은 분이 있는 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쿡쿡쿡쿡쿡. 그런 키워드로 검색을 한 마음에 부응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공간일텐데.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런 키워드로 이 공간이 연결된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어쨌든 덕분에 한참을 웃고 나니 기분이 좀 좋아지려고 한다.
참 간단하지 않은가.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조금 더 행복해진다는 것.
아주 어렸을 적에, 초딩 3-4학년 때쯤이었을까.
난 행복한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딱히 행복하지 않을 것도 없지만 딱히 행복한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다.
무슨 일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애가 관여할 일도, 물론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저 속상하고 불안하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장소를 찾아 혼자 웅크리고 앉아 지금 이 순간 난 불행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의 딱히 행복하지 않을 것도 없지만 딱히 행복한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 순간 난 행복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불행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했을 따름이지.
조금 더, 별다른 일 없이 지나는 하루하루의 일상에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종종 잊어버리지만.
조금 기분이 좋아진 김에 이제 미루어두었던 일들을 해볼까나.
<프린스게임>이란 제목 옆에 일명 왕자놀이라고 되어 있고, '동화나라의 공주님들'이라는 부제(?)도 살짝 당혹스럽게 만든다.
현대물인데 왠 왕자? 왕자병의 왕자야?
그랬다. 왕자병의 왕자였던 거다.
줄거리를 말하기는 참 난감한 작품이다. 수많은 추종자에 둘러쌓인 왕자병 대학생 신우의 이웃 사촌이자 친구인 준희가 "난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데이트해요" 필의 신우와 맺어가는 일상적 관계와 미묘한 심리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내용인지라.
결말 또한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미묘하다. 현실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심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우와 준희의 관계가 한발짝 진전이 된 거라고 볼 수도 있고 준희 또한 결국 신우의 수많은 추종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에.
노말시티의 이샤를 연상시키는 작화의 신우 또한 이런 인간이라고 확언하기 애매한 인물이다. 확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은 치유불능의 왕자병인 것도 같고, 의외로 겉보기와는 달리 내심으로는 지고지순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로맨티스트인 것도 같고.
어쨌거나, <17세의 나레이션>이나 <이 카드입니까> 등을 포함한 강경옥님의 줄거리 전개보다는 미묘한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프린스게임>도 흥미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문득, 이런 특별한 사건사고, 전개가 없는, 미묘한 심리묘사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은 참 괜찮은데도 불구하고 드라마나 애니로 만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아니, 미니시리즈 같은 것으로는 어렵겠지만, <한뼘 드라마>같은 것으로 만든다면 괜찮을 수도.
결국 획일적인 드라마 제작 포맷이 문제인 거다.
매니아층에게 상당히 호평을 받았음에도 <한뼘 드라마>도 오래 가지는 못했었으니.
아니, 1년 넘게 갔으니 장수했다고 봐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본방을 시청한 것은 몇 번 없는 것 같다.
하루에 5분 간 방송되는 드라마를 지켜서 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아마 나처럼 온라인 다시보기로 몰아서 본 사람이 많지 않을지.
<궁>이 드라마화되고 난 이후, 주지훈군의 데뷔작이라고 해서 다시보기로 새삼 시청한 사람도 꽤 되지 않을까 싶고.
<별순검>이나 <한뼘 드라마>처럼 다양한 소재, 다양한 포맷의 드라마가 좀 더 많아진다면 TV를 통해보는 세상도 조금 더 다채로와질 것 같은데.
시청률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애니, 소설, 만화로 나오고 있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망량의 상자>에서는,
망량이 들러붙은 인간들이 상자 안에 인간(의 일부)을 담는다.
따라서 상자는 인간이 담긴 상자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망량을 담은 상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자는 망량의 상자가 되고, 망량의 상자 안에 인간이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 자체가 망량이 깃든 존재로서, 망량을 담는 상자, 즉 망량의 상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망량을 담는 상자인 인간 안에 망량이 담겨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망량의 상자>에서 말하는 '망량의 상자'는,
인간을 담는 상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망량을 담는 상자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의적으로 사용된 제목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망량을 담는 상자로서의 인간.이라는 의미가 좀 더 강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평범한 고교 생활을 즐기고 있는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단행본으로 30권이 넘는 뷴랑의 사건을 차곡차곡 해결하고 있으니.
어쨌든. Q.E.D.에서 e^(πi)= -1이라는 오일러의 공식과 관련된 사건이 등장하는 에피가 있다. 토마의 M.I.T. 동기 중 항공공학, 유전공학, 양자역학에서 수석이었던 사람이 각각 e, π, i 에 부합되는 형태로 변사체가 된 채 발견된다. 그 와중에 사체가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또 한 사람이 -1에 부합되는 형태로 변을 당한 흔적이 발견되고, 이 사람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토마의 동기이며 수리 전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동기 중 수리 분야의 수석은 토마였던 것.
사건의 진상인 즉슨, 범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도 불리는 오일러의 공식을 인간의 말을 초월한 신의 말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더불어 자신의 이름 또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각 분야의 수석들과 더불어 자신도 변을 당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수석이었던 것으로 착각해 영원히 기억할 것으로 생각하고.
거짓 명예를 위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한다는 것도 일단 황당하고 허탈한 일이지만, 이름을 남기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 또한 생각해볼 일이다.
하고 싶은 일, 또는 필요한 일을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남기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하는 동기가 명예욕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동기가 무엇이든 명예로울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명예가 수반되는 일을 쫓는다면 명예가 수반되지 않은, 그러나 꼭 필요한 일은 누가 하지?
알아주지 않더라도, 명예가 수반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필요한 일들을 해왔고 하고 있을 모든 이들을 위한 건배!가 가끔씩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러나 꼭 필요한 일이란 반드시 어떤 일을 하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되는 자리를 지키는 것 또한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일 수 있다.
토마는 말한다.
난 남에게 내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친구나 가족들이 불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친구나 가족으로서 서로서로의 옆에 있음으로서,
친구의 자리, 가족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나의 존재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실은 이것이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이고 쉬운 일인 듯 싶으면서도 또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름이란, 기본적으로,
누군가 내가 모르는 많은 이들이 기억해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친구들, 가족들에게 불리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그들과 같이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